그러나 이 영화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던 그가 어느새 얼마나 많이 걸어왔는지를 보여준다. 같은 말이라도 화술과 태도가 달라지면 새 언술이 될 수 있다. 이 신작을 초기작 ‘돼지가 우물에서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과 비교하면, 주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 그 어느 작품보다 온도가 높고(그래봤자 상온 이하라서 여전히 쌀쌀하지만), 유머의 당도(糖度)가 높아진(아직 씁쓸한 뒷맛이 남지만) ‘해변의 여인’에는 심지어 동성간 우정에 대한 묘사와 슬랩스틱까지 들어 있다. 초기작들에선 꿈쩍 않던 카메라가 이젠 줌인(초점거리를 변화시켜 피사체에 접근하기)과 줌아웃까지 넘나든다. ‘치정살인극’으로 데뷔했던 감독은 이제 시종 낄낄대게 만드는 ‘섹스코미디’를 만들며 자기모멸에서 자기연민으로 무게중심을 슬쩍 옮겼다.
영화감독인 중래(김승우)는 미술감독 창욱(김태우)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창욱이 데려온 애인 문숙(고현정)에게 관심을 갖게 된 중래는 바닷가 숙소에서 그녀와 하룻밤 인연을 맺는다. 일행이 서울로 돌아온 이틀 뒤 혼자 바닷가에 내려간 중래는 유부녀 선희(송선미)와 술을 마시다 숙소로 함께 간다. 그런데 그 광경을 문숙이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홍감독 영화에선 배우가 구사할 수 있는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해변의 여인’ 연기 비중이 어떤 전작보다 커지게 된 데는 고현정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홍상수스러움’에 잘 녹아 있으면서도 뛰어난 대사 처리 능력과 생생한 연기 디테일로 앙큼한 듯, 맹한 듯, 푼수인 듯, 엉뚱한 듯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빚어냈다. ‘해변의 여인’은 여성들이 ‘주체’로 중심을 이룬 홍 감독의 첫 작품이다. 김승우는 ‘수컷’의 맹목성을 잘 그려냈고, 김태우는 홍상수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연기자의 면모를 보인다. 송선미에게선 홍상수식 연기연출에 흥미를 느끼고 빠져들기 시작한 배우의 흥분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