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진의 Tour & Culture)겨울의 빛, 루미나리아 Luminaria

  • 등록 2008-12-01 오전 10:50:00

    수정 2008-12-01 오전 10:50:00

[이데일리 정장진 칼럼니스트] 이제 12월이다. 늦더위에 가을 가뭄까지 들더니 어느덧 비도 오고 바람도 제법 차가워졌다. 군밤 장수, 오뎅과 떡볶이 장수들도 제철을 만나 삼삼오오 찾아오는 손님들로 붐빈다.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거리엔 벌써 연말연시 분위기를 내는 화려한 네온들이 불을 밝히고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경기만 좋았다면 사실 한 번쯤 흥청댈 수도 있는 계절이다. 충동 구매도 좀 하고 선물도 많이 사고 연락이 온 여기저기 모임도 다 참석하고……

화려한 불빛들 중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단연 백미다. 단순히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의미보다도,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혹은 캐롤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던 추억이 있을 수도 있고 동생하고 선물을 놓고 다투다 추운 마루에 나가 손들고 벌을 서던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으며,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 있는지 보겠다며 밤을 새다가 그만 잠들어버린 추억도 떠오를 것이다. 해가 바뀌는 계절이고 한 해를 되돌아 보는 계절이라 크리스마스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 지도 모른다.

▲ 서울 루미나리아

서울에도 겨울이 되면 몇 년 전부터 ‘루미나리아’라는 낯선 이름의 빛의 축제가 열리고 있다. 몇 년째 계속되다 보니 이젠 루미나리아가 연말 행사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불빛 축제로 고쳐서 부르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불빛 축제로 불렀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국에서 들어온 축제이니 외국 이야기를 할 때는 꼭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기도 하다.
 
▲ 파리 오페라가 일대 백화점의 루미나리아
▲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루미나리아

서울만이 아니라 아시아, 유럽, 미국 등의 연말연시도 화려하고 추억이 깃든 계절이다. 연말연시에 관광 목적이든 사업 때문이든 외국 여행을 하게 되면 대부분의 도시에서 루미나리아를 만나게 된다.

성당의 빛, 거리의 빛

동양에서도 빛은 지혜와 자비를 상징한다. 허망을 버리고 참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에서도 빛은 큰 의미를 지닌 상징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도 빛은 사랑과 지혜를 상징한다. 거리마다 장식된 루미나리아는 물론 상업적 성격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화려한 겉모습 뒤에 상술이 숨어있는 것이다. 
 
▲ 불을 환히 밝힌 오스트리아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
빨간 산타클로스도 사실은 유명한 탄산음료 회사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산타클로스라는 말 자체가 세인트 니콜라스를 미국식으로 줄여서 편하게 부르다 만들어진 말이다. 디즈니 등의 만화영화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 미국식 성탄절을 퍼뜨린 장본인이다.

▲ 파리 생 세부륑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루미나리아는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시작된 빛의 축제다. 물론 요즈음은 성당 외부에까지 조명을 켜놓아 성당은 이제 바깥쪽까지 모두 빛에 감싸여있다. 외국에서 오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한 정책 탓에 생긴 현상이다. 아름다운 조명을 받은 성당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성당 내부는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문화재로 등록된 성당이나 교회 이외에는 민간인에게 팔려나가 디스코텍이 되거나 창고로 쓰이기도 하는 것이 요즈음이다.

어쨌든 서울, 파리, 뉴욕, 로마, 빈, 런던, 홍콩을 가리지 않고 12월의 도시들에서는 루미나리아, 불빛 축제가 벌어진다. 그리고 이 축제는 “하나, 둘, 셋” 카운트다운을 하며 새해를 맞는 지점까지 그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모네가 그린 빛

▲ 모네의 <루앙성당연작>

성당 안의 빛이 거리로 나왔다. 이 빛은 그러므로 가능한 한 성스러운 빛이 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루앙 성당 연작을 그렸을 때 파악해보려고 달려들었던 빛이 이 성스러운 빛이었을 것이다.
 
19세기 말, 이미 누구도 성당을 예전처럼 진지하게 찾지 않던 시절, 모네는 석회석으로 지은 거무튀튀하게 변한 성당을 찾아가 아침에서 저녁까지 햇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성당 모습을 수십 장 그렸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부숴버리면서 오래 작업을 한 끝에 완성된 모네의 성당 연작은 범상치 않다.
 
성당이 무너져 그 밑에 깔리는 악몽을 꾸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이 집념은 빛이라는 것이 성당 안이나 밖이 아니라 정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빛은 역설적이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오직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모네가 연작을 그린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움과 갈구의 대상인 이 빛에 비하면 루미나리아의 빛은 너무 가볍고 사납기까지 하다. 가장 화려하다고 자랑하는 루미나리아, 더 이상 나 이외의 빛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화려해 쉽게 질리기도 한다. 누구도 루미나리아 앞에서 성당이 무너지는 악몽을 꾸지는 않는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빛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도시의 조명시설이나 상업적 장식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루미나리아의 기원만이라도 알고 화려함을 즐겨야 되지 않나 싶다.

특히 청계천 루미나리아나 세종문화회관 앞의 루미나리아는 무언가 허전하다. 몇 년 동안 계속 봐왔지만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조명 방식 등이 파리 같은 도시의 것을 거의 그대로 모방했다는 느낌을 준다. 또 어딘지 비잔틴 냄새도 조금 나는데, 한 마디로 국적이 없는 불빛 축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실제로 나란히 놓고 비교를 해보면 거의 똑같다. 기독교 축제인데 불교 분위기를 낼 수도 없고, 여러 고민이 적지는 않겠지만, 차츰 창조적인 서울만의 독특한 빛이 나왔으면 싶다.

기억에 남는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성탄 트리
 
▲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트리
런던에서 겨울을 보낸 경험이 있는 이들은 트라팔가 광장의 분수 옆에 세워진 성탄 트리를 기억할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도움을 준 영국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르웨이에서 매년 전나무를 하나 선물해서 세워지는 성탄 트리다. 추운 겨울, 인근 펍에서 한 잔 하고 지나치다가 차가운 물방울을 맞으며 이 성탄 트리를 보면서,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고 또 초라하지도 않은 적당한 모습에 잠시 서서 눈길을 보낸 기억이 새롭다. 그 앞의 국립 미술관이나 성당도 함께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화려하기만 한 파리의 샹젤리제나 오페라가 일대의 백화점 거리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여행·문화·예술 포탈 레 바캉스(www.lesvacances.co.kr) 대표 정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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