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가사의 적극 모드 변신
먼저 평가사들이 갑자기 앞 다투어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발표하는 배경부터 살펴보자. 신BIS 도입에 따른 인허가 이슈(ECAI: 적격외부신용평가)와 이를 매개로 한 당국의 적극적인 지도가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다. 일반투자자의 입장에서야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니고 그냥 지켜보며 즐기면 될 일이다.
투자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신용평가 시장의 질서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 모습을 드러낸 자본시장통합법은 본격적인 IB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의 시장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IB시대의 신용평가는 투자자의 선택 폭이 커지면서 평가사 사이의 차별성이 부각된다. 나아가 신용등급의 평가사별 등가성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최근 신용평가사의 움직임은 아직 서툴고 어색하지만, 어쨌든 근본은 투자자를 향한 절실한 구애의 행동임에 틀림없다. 배경이야 어찌 되었든 열심히 애쓰는 모습은 적지않은 감동을 준다. 하지만 그 사이로 무언가 부담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 등급 변동이 보여요!
예전에도 간간이 평가사의 설명회는 있었지만, 그다지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었다. 워낙 빈도도 뜸했지만 무엇보다 내용의 구체성이 미흡했다. 그런 면에서 최근의 설명회는 확실히 차별화된다. 평가사가 새롭게 내놓은 매트릭스 방식의 평가방법론(또는 평가기준)은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한두 notch의 차이와 나머지 20%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관심이 등급 자체보다는 등급의 변동 가능성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계산상으로 등급에 대한 접근성은 80%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90% 이상의 등급변동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신용평가사의 경쟁력
그러면 한두 notch의 차이 그리고 20% 가량의 변동요인을 포함한 신용등급의 정밀함이 신용평가사의 남은 경쟁력인가? 그것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평가사의 진정한 경쟁력은 매트릭스 자체를 바꾸는 데에 있다. 환경이 달라져서 리스크 요인이 바뀌면, 당연히 신용평가는 이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용평가 매트릭스의 기본적인 체제와 논리구조는 오랜 경험과 담론을 통해 구축된 것으로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들이다. 하지만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요소와 척도는 어느 것도 항구적인 것은 아니다. 매트릭스도 사실은 과거 신용등급 결정을 아우른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래에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뿐이다.
평가방법론의 구체화는 자의적 신용평가에 대한 외부의 우려를 덜고, 평가사 내부적으로는 논리를 정비하고 등급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더불어 어떤 중대한 환경변화가 있을 때 방법론의 변경을 통해 시장에 미리 신호를 보내 연착륙을 유도할 수도 있다. 잘만 활용하면 두루두루 장점이 많다.
◇ 기술보다는 철학
모든 창조적 작업은 기술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명작일수록 상세한 묘사 이상으로 철학적 깊이가 부각된다. 신용평가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투자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것은 대개 기술적 측면이다. 하지만 큰 실패는 항상 기술이 아니라 철학의 이슈에서 비롯된다. 산업정보와 기업동향 등 기술적인 측면에 현혹되면 신용시장의 기본 틀과 모순된 현실이 오히려 멋있어 보일 때도 있다. 폭발적 확장, 극단적 단기자금 의존, 기발한 자금조달 등이 다 그런 것이다. 그래서 모두 한 방향으로 내달은 결과가 신용위기다.
신용평가의 매트릭스는 아무래도 기술적 측면이 강조된다. 물론 기술적 측면도 중요하다.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는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하지만 현실을 답습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 신용평가에 대한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용평가의 매트릭스를 반가워 하면서도 한편으로 경계하는 마음이 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철학이라는 표현을 감히 ‘보편성에 대한 탐구’ 정도로 정의해보자. 존 템플턴 경은 영어에서 가장 비싼(expensive) 네 단어로 “This Time, It's Different(지금은 다르다)”를 들었다. 소위 실패를 부르는 네 단어다. 대부분의 실패는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보편성을 놓치면서 빚어진다. 외환위기, 대우/현대사태, 카드위기가 모두 그랬다. 한국적 특수성에 신용평가의 보편적 기준이 묻혀버린 사례는 지금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매트릭스의 구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백번 양보해서 약간의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평가기준까지 비트는 것은 너무나 아프다. 신용평가의 기본을 다시 생각해보는 이유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우리나라 유통업은 놀라운 경쟁력으로 글로벌 유통공룡을 패퇴시키고 있다. 하지만 구조적 측면에서 본다면 유동성리스크가 아킬레스건이다(칼럼 “신 영웅시대 아킬레스와 신세계(04.11.15)” 참조). 미국 K-Mart와 우리나라 신용카드사의 실패사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유동성리스크는 우리 유통업의 평가기준에서 빠져있다. 과거의 등급결정논리를 다툴 필요는 없겠지만 유동성리스크의 무서움은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공존을 위한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Credit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