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기업의 시대]① ISO26000 탄생..''착하면 성적도 좋다?''

전문가들 "ISO26000 발효는 리스크이자 기회"
"국내 기업 대부분이 새로운 국제 표준에 인식 부족''
  • 등록 2010-12-28 오전 9:10:54

    수정 2010-12-28 오전 9:10:54

[이데일리 이승형 기자] 기업들의 '윤리적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책임 국제표준(ISO26000)'이 지난 11월 발효됐다. 기업의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이 표준을 놓고 관련 전문가들은 '미래 전략'을 짜기 위한 교과서로 삼자고 조언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세계 시장에서는 '착한 기업이 성적 또한 우수하다'는 방정식이 성립돼 왔기 때문이다. 이제 자선이나 기부, 상생협력 등의 외형적 활동을 넘어 사업 자체를 사회적 책임에 적합한 구조로 바꾸는 기업들마저 출현하고 있다. 
 
이에 ISO26000이 갖고 있는 의미를 짚어보는 한편 삼성, LG, 현대차,SK 등 국내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활동(CSR)의 현황은 어떠한지 총 6회에 걸쳐 살펴보도록 한다.<편집자주>


지난 5월 21일 북유럽의 작은 도시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요란하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의미심장했던 회의가 끝나자 멀끔하게 생긴 한 중년남성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1백쪽 분량의 문서가 마침내 합의되고, 400명의 전문가와 관계자들이 기립박수를 치던 순간에는 정말이지 가슴이 벅차 오르며 뭉클해 지더군요."

그의 이름은 국제표준기구(ISO)의 부의장인 스테판 소더버그. 약 6년에 걸친 열띤 연구와 토론 끝에 '사회적 책임 국제표준(ISO26000)'이 이날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되자 소더버그는 비로소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 "구속하지 않으니 더 무섭다"

ISO26000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 활동(CSR)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한 글로벌 점검기준이다. 환경, 인권, 노동, 지배구조, 공정한 업무 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사회 참여 등 7개 분야에 걸쳐 300여개의 지침이 담겨 있다.

ISO26000은 강제조항이 아니다. 제품이나 서비스처럼 국제 인증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준은 기업들에게 새로운 '무역장벽'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CSR 전문가인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이미 공정무역 등을 위반한 기업들에 대해서는 글로벌 시장에서 불이익을 주는 관행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이제 ISO26000까지 발효됐기 때문에 이 기준을 어기는 기업들과는 거래마저 끊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ISO26000은 제3자가 객관적으로 인증을 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기업 스스로가 노력해서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더 까다롭다.

그러나 국내 기업 대부분이 갖고 있는 ISO26000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미흡하다.
올해초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매출액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ISO26000에 대해 대응전략을 갖추고 있다"고 응답한 기업은 4.9%에 불과했다.

기업들 뿐만 아니라 ISO26000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경제단체 역시 대한상의를 제외하고는 전무한 실정이다. 대한상의는 최근 ISO26000 진단지표를 개발 완료하고, 내년 1월중 국내 기업들에게 전달해 이용하도록 권고할 예정이다.

◇ "자만하다가는 한방에 '훅' 간다"

지난 1996년 미국 라이프 紙 6월호에 실린 사진. 파키스탄의 12세 소년 타릭이 나이키 로고가 선명한 축구공을 꿰매는 이 사진 한 장으로 인해 당시 나이키는 아동 노동 착취 기업이란 비난과 함께 주가와 매출이 동시에 추락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봐야 했다. 이후 나이키는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등의 새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굳이 ISO26000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착한기업이 대접받는 시대'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TV 등에서 기업들이 앞다퉈 보여주는 공익 켐페인 광고는 CSR을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일부 사례일 뿐이다.

그러나 착한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과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그 점을 간과한 채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 하루 아침에 돈과 명성을 모두 잃어버린 '소탐대실' 기업들은 수없이 많다.

토요타는 원가절감에만 집착하며 고객안전을 소홀히 하다가 지난 2월부터 현재까지 총 950만여대의 차량을 리콜해야 했다. 수십조원의 돈을 손해본 것은 물론 그동안 쌓아올린 일본차의 명성마저 날려버렸다.

지난 6월 글로벌 정유회사 BP가 일으킨 최악의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건은 작업장 관리소홀이 주 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BP의 주가는 폭락했고, 시가총액이 반토막나면서 무려 100조원이 허공으로 날라갔다.

반면 CSR을 새로운 '미래전략'으로 이해하고 수십 년 전부터 준비해온 기업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필립스. 이 회사는 아예 사업 구조 자체를 CSR에 적합한 분야로 탈바꿈시켰다. '사업=사회공헌'이라는 등식을 따른 것.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필립스를 '지속가능을 위한 체질개선'에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기업으로 꼽는다. 사업을 하면서 오염물질을 발생하거나 에너지를 낭비하는 등의 '민폐'는 사전에 차단하는 대신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지구촌 발전에 공헌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한 셈이다.

필립스의 주요 사업분야는 조명과 헬스케어. 친환경 조명제품으로 에너지 절감에 나서는가 하면 아시아 빈민 지역에는 적극적인 의료 지원 활동을 펴고 있다.

류 대표는 "필립스 등 유럽의 몇몇 기업들은 내부적으로 CSR이 '체화(體化)'돼 있다"며 "자선, 기부, 상생협력 등 아직까지 외형적 CSR에 치중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과는 대조적"이라고 말했다.

◇ "착하면 성적도 좋다"

현대 마케팅의 대부'라 일컫는 필립 코플러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석좌교수는 저서에서 "기업의 사회참여 사업은 자선, 공익, 이타주의를 실현하는 동시에 비즈니스 상의 실리도 거둘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되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의 설명대로 착한기업은 착한소비를 부르고 매출을 얻는다. 스타벅스가 공정무역을 통해 얻은 커피만을 판매하면서 고객들의 호응을 얻은 것이나 나이키가 아동 노동으로 생산된 제품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매출이 회복된 것은 '착한기업 순환법칙'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지난 2007년 LG경제연구원의 조사에서 '품질이 같다면 사회적 책임을 잘 이행하는 기업의 제품을 더 비싼 값으로 살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전체의 88.7%를 차지한 점은 이 같은 법칙을 뒷받침한다. 또 골드만삭스가 지난 2005년에 조사한 결과 CSR을 실천한 기업이 실천 이전과 비교해 25%의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는 점도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특히 적극적인 CSR은 혁신까지 불러온다는 점도 매혹적이다. 평소 조깅을 즐기는 트위터 공동창업자 비즈 스톤은 "상류층이 아닌 서민들이 어떻게 하면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트위터라는 획기적인 SNS(Social Network System)를 만들었다.

안정권 대한상의 지속가능경영원 주임연구원은 "기업들이 CSR을 실천함으로써 환경, 사회적 요소뿐만 아니라 경제적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도 혜택을 보는 시대가 왔다"며 "국내 기업들, 특히 최고경영자들의 인식 전환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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