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서울 남산 자락에는 19세기부터 일본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애초 조선은 외국인이 한양에 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 조선은 몰려드는 외세의 압력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하릴없이 거주를 허락하되 거주지는 한강 밑으로 제한한 게 최선이었다. 문화와 풍속이 다른 이들끼리 섞여 살면 싸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 광화문 너머로 보이는 청와대.(사진=문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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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남산을 낀 지금의 중구 예장동 일대에 일인(日人) 촌락이 형성됐다. 먼저 들어섰던 일본 공사관이 여기 있던 것도 한몫했다. 공사관 건물은 나중에 통감부(총독부 전신) 관저로 쓰인다. 바로 일제강점의 상징이 되는 장소이다. 1910년 8월22일 순종의 전권을 위임받은 이완용은 통감 관저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을 만나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역사는 이날을 경술국치라고 기록한다.
통감 관저가 있는 자리와 그 주변 촌락 마을을 일제는 왜장대(倭將臺)라고 불렀다.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진을 치고 성을 쌓은 곳이고, 이 주변에 장(場)이 서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정확한 사료나 기록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외려 조선의 예장대가 있던 지역이어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유력하다고 한다. 예장대는 조선 후기 군인이 무예를 연마하던 무예장을 가리킨다. 이 터가 남산의 북쪽 면에 자리하고 있었고, 통감 관저를 비롯한 왜성대가 여기에 형성됐다. 발음이 유사한 예장대에서 따와 왜성대로 불렀다는 것이다. 지금의 예장동의 이름도 예장대에서 비롯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왜장대는 자취를 감췄다.
| 중앙정보부가 들어섰던 중구 예장동(사진 오른쪽 아래)은 일제 강점기 통감 관저가 있던 지역이다. 경복궁과 청와대(사진왼쪽 위 빨간 원)가 보이는 지역이다.(사진=네이버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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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장대가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선 것은 5·16 쿠데타 이후이다. 권력을 쥔 군부는 1961년 6월 중앙정보부(중정)를 신설한다. 그때 중정이 들어선 곳이 왜장대 일대이다. 본관을 비롯해 조사실과 별관, 감찰실, 부장 관저 등이 이곳에 자리했다. 중앙정보부를 남산으로 통칭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애초 왜장대가 남산에 자리 잡은 것은 조선의 법칙에 어긋난 일이었다. 조선의 남산에는 민가가 없었다. 남산에서는 경복궁이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백성은 왕보다 높은 데 머물 수 없었다. 특히 왜장대가 있던 북쪽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일인들이 모여들면서 이 법칙이 깨졌다. 당시 조선 국력이 얼마큼 쇠락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철권통치 시대, 중정이 남산 북쪽에 들어선 것도 아이러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1961년부터 집무실로 쓰던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꾸었다. 직후 중정이 남산에 자리 잡으면서 청와대를 내려다보는 꼴이 됐다. 중정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권 유지의 역할을 한 점에 비춰 보면, 불편한 위치일 수 있다.
이후 김재규 중정부장은 1979년 10·26을 일으켰다. 후신 국가안전기획부는 1995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겨가 지금의 국가정보원으로 기능한다. 예전 예장동 중정 건물은 서울유스호스텔(본부), 문학의 집(관저), 종합서울방재센터(별관), 서울시청 별관(수사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