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개 치는 들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스기모토 히로시(사진=삼성미술관 리움, ⓒHiroshi Sugim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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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인구 기자] 일본 현대사진의 대표작가 스기모토 히로시(65)의 발언은 거침없었다. “요즘 건축가들은 아티스트에 대한 배려가 없다. 미술관이 비어 있을 때 멋있어 보이는 방식으로 건물을 설계한다. 삼성미술관 리움도 에스컬레이터가 전시장 한복판에 설치돼 있는 걸 보고 한참 고민했다. 리움은 렘 쿨하스가 설계한 것 아닌가. 내가 건축가가 된 심정으로 전시장을 완전히 새롭게 꾸몄다.”
은발의 거장은 모국어인 일본어를 놔두고 유창한 영어로 리움의 디자인을 꼬집었다. 지난 3일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개인전 개최 소감을 말하는 자리였는데 삼성미술관 리움의 불편한 디자인을 타박하는 연설이 됐다. 웃으면서 얘기했고 그만큼 전시공간의 재창조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명이었느나 미술관 관계자들은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할 말을 하는 스기모토 히로시가 내년 3월 23일까지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히로시 스기모토-사유하는 사진’ 전을 연다. 국내에서 그룹전은 몇 차례 가졌으나 개인전을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총 49점이다.
| ‘U.A. 플레이하우스’(사진=삼성미술관 리움, ⓒHiroshi Sugim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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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사유하는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스기모토는 시간을 다루는 작가다. 시간을 거슬러 보이지 않는 기억을 더듬고, 빠름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느리고 깊게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일본 도쿄의 세인트폴대학과 릿쿄대학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전공했으나 197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LA아트센터 디자인컬리지를 다니며 사진을 전공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독일 구겐하임미술관 등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했다. 2001년 사진계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핫셀블라드상’을 수상했고, 2009년 영국 더타임스의 ‘1900년 이후 활동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 200명’에 선정됐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곽준영 책임큐레이터는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장인적 기술, 간결한 형식, 깊이 있는 철학으로 7가지 연작을 발표하여 세계 미술계에서 큰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표작은 첫 번째 연작인 ‘극장’을 비롯해 ‘바다풍경’ ‘초상’ ‘번개 치는 들판’ ‘가속하는 불상’ 등이 있다.
‘극장’은 미국의 1920~1930년대 아르데코 극장과 1950~1960년대 드라이브인 극장을 장시간 노출 기법에 담은 작품이다. 영화가 상영된 극장 내부지만 스크린은 빛나는 백색의 공백이 됐고 객석은 텅 비어 있다. 시간에 의한 중심과 주변의 역전이다. ‘바다풍경’은 전 세계 바다를 찾아다니며 찍은 추상적인 바다의 모습이다. 표현되는 형식은 매우 단순하다. 거대한 화면을 수평선이 딱 절반으로 나누고 있다. 시간과 장소를 특징하는 모든 요소가 배제된 ‘태고의 바다’ 같은 모습이다. 이 중엔 제주도에서 바라본 ‘황해’도 섞여 있다.
| ‘바다풍경’ 중 ‘황해’(사진=삼성미술관 리움, ⓒHiroshi Sugim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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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6명 부인들의 초상화다. 독일 구겐하임미술관 커미션으로 제작됐다. 16세기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의 초상화를 토대로 19세기에 제작된 밀랍조각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 한 장 속에 회화·조각·시간이 압축돼 있는 셈이다. ‘번개 치는 들판’과 ‘가속하는 불상’은 최근작이다. ‘번개 치는 들판’은 40만볼트의 전기봉을 금속판에 맞대는 위험한 실험을 통해 탄생했다. 사진발명가 탈보트의 정전기 실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과학과 예술이 융합된 작품이다. ‘가속하는 불상’은 사진과 영상, 조각이 어우러진 총체적 작업이다. 이중 17점의 조각 설치품인 ‘5원소’가 눈에 띈다.
사진작가임에도 영상과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작업에 도전했듯이 스기모토는 최근에도 도전을 거듭하고 있다. 건축 설계와 함께 일본 전통극 연출까지 영역을 더욱 넓히고 있다. 노 작가의 열정은 끝이 없어 보인다. 일반 7000원, 초·중·고생 4000원. 02-2014-6900.
| ‘가속하는 불상’(사진=삼성미술관 리움, ⓒHiroshi Sugim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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