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70년] 현기영 "질곡의 기억도 우리 역사"

소설로 제주 양민 학살 알린 노작가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고문.. “진실 알려야”
역사 지우려 했던 국가.. ‘기억 투쟁’으로 맞서야
  • 등록 2018-03-23 오전 6:00:00

    수정 2018-03-23 오전 9:02:08

제주4ㆍ3사건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는 소설가 현기영이 12일 경기 성남 분당구 자택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사진=신태현 기자)
[이데일리 이정현 기자] “아직도 꿈에 ‘그날’이 떠오릅니다. 국가는 ‘망각의 정치’를 내세웠지만 입을 막는다고 진실이 사라지겠습니까?”

‘제주4·3사건’(이하 제주4·3)을 소재로 한 소설 ‘순이삼촌’을 쓴 현기영(77) 작가는 담담한 말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 이른바 이른바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제주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그는 최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있는 자택에서 이데일리와 만나 “70년 전 제주도민은 불의와 탄압에 맞서 싸웠고 제주4·3은 저항의 의지가 담겼다”며 “죽는 걸 알면서도 싸워야 했고 이제는 그 의미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 작가는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고문이다. 40년 전에 발표한 ‘순이삼촌’을 비롯해 ‘목마른 신들’ ‘지상의 숟가락 하나’ 등 제주4·3을 소재로 한 소설을 연달아 발표하며 숨겨진 역사를 재조명했다. 40년의 작품 활동 중 3분의 1이 관련 사건을 다뤘다.

현기영 작가는 “국가의 폭력과 공권력에 탄압당한 제주 민중의 역사를 다함께 ‘정명’해야 한다”며 “불의를 잊으면 또 한 번 똑같은 비극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제주4·3은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정명’은 두 가지 의미다. 제주4·3이 민중항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이름을 정해야 한다는 것과 일부 공산당원에 의해 일어났다는 오해를 바로잡겠다는 주장이다.

“제주4·3은 해방 후 삼일절을 맞아 남측의 독자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미군정하의 경찰이 발포하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탄압에 맞서 일어났죠. 싸우면 죽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지는 싸움이라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총칼로 무장한 이들에게 죽창으로 맞섰으니 이길리 있겠습니까. 여파로 5만여 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부터 노인들도 있었죠.”

제주4·3은 하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삼일절, 경찰의 발포 이후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총파업으로 맞섰다. 당시 미군정 등은 극우집단인 서북청년회 등을 동원해 시위에 참가한 제주도민을 잡아들여 고문하는 등 탄압했다. 결국 사망자가 속출했고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당시 군경은 이를 ‘빨갱이가 일으킨 무장폭동’이라 규정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49년 1월18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이 일로 300명이 넘는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4·3의 비극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져 수년간 제주도민을 괴롭혔다.

현기영 작가는 제주4·3을 공권력이 국민을 파괴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오랫동안 “가슴에 묻으라”고 입막음한 이유다. 때문에 제주4·3은 오랫동안 잊힌 이름이 됐다. 독재정권에 의한 ‘기억의 타살’은 국민의 ‘기억의 자살’로 이어졌다. 현 작가를 비롯해 문학인과 예술인 등은 학살의 역사를 글에 담았고 노래로 불렀다. 국가는 이들을 잡아들였고 고문했다. 현기영 작가 역시 ‘순이삼촌’을 쓰고 발표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았다.

“더 나은 나라가 되려면 과거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반성해야 하며 후대에 기억을 전달해야합니다. 독일이 나치의 잘못을 인정하고 오히려 세계에 알리 듯이요. 군과 경찰을 포함해 지금의 정부가 70년 전과 같지 않지만 일종의 후배로서 과거의 잘못에 사과해야합니다. 미군정하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미국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제주4·3 범국민위원회는 20년 전에 50주년을 맞아 처음 결성한 후 10년여 주기마다 ‘기억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올해는 70주년이자 사건을 직접 겪은 생존자들이 살아서 맞이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10주기인 만큼 사업에 속도를 냈다. 그동안 진행해온 진상규명을 본격화하고 유해 발굴과 관련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건립하는 등 과제가 남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며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더불어 국민의 역사의식이 조금씩 바뀌었다. 현 작가는 “70년 전 돌아가신 5만여 명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제주4·3을 기억하고 위령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현기영 작가는 제주4·3을 소재로 한 더 많은 문학과 대중예술이 나와 국민에 의해 기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주4·3’은 제주에 국한한 게 아니라 불의에 맞서 싸웠던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제주4·3사건은...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청으로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이 제정, 공포됐다. 그해 8월 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회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 무려 7년 7개월 동안 진행된 근대사의 아픔이다. 2000년 6월부터 시작된 사건희생자 신고 접수 결과 1만 4028명으로 집계됐으나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공동체적 보상의 일환으로 4·3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됐고, 2008년 3월 28일 제주시 봉개동에서 4·3평화공원이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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