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아무도 반성 않는 상법 개정 반대론

  • 등록 2017-03-01 오전 8:20:00

    수정 2017-03-01 오전 8:20:00

이병헌(사진 가운데) 주연의 영화 싱글라이더(A single rider)의 한 장면. 사진 속 바닥에 뒹구는 `우린 투자자가 아닙니다. 사기를 당했습니다`란 피켓 문구는 동양 사태 당시 실제 피해자모임이 사용했던 문구다.(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데일리 박수익 기자] 최근 개봉한 영화 ‘싱글라이더’는 동양그룹 부실채권 사태가 기본 배경이다. 영화는 부실채권을 판매한 증권사 지점장(이병헌)이 무릎을 꿇고 고객에게 사과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영화속이나 현실 속 동양 사태에서 진짜 무릎을 꿇어야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현실의 출발점은 순환출자라는 기형적 지배구조 속에 감춰진 동양그룹 부실이었다. 부실을 감추고 현재현 회장의 경영권을 보위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계열사가 동원됐고, 계열사들은 개인투자자들에 부실채권(회사채·CP)을 떠넘겼다. 이미 동양 계열사들은 빌린 돈의 이자도 내지 못하는 부도 직전 상황이었지만 개인투자자들로부터 부실채권을 팔아서 쓸어모은 돈으로 다시 계열사 주식을 사는 등 자신들의 지배력 유지에만 골몰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뜻있는 인사들은 더 이상 이렇게 회사를 운영해선 안 된다는 직언을 그룹 최고위층에 전달했으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듯 되려 직언자들이 회사를 떠나야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2월 임시국회에서 끝내 상법 개정안 처리가 무산됐다. 지난 수개월 상법 개정안을 둘러싼 흐름은 ‘외국자본의 경영권 침탈’ ‘대기업 죽이기’와 같은 강경 반대논리가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찬성논리를 압도했다. 반대논리나 부작용, 법리적 논쟁 하나 없이 완벽한 법은 없기에 법안을 둘러싼 찬반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에 앞장 선 정부·여당 그리고 재계로 통칭되는 경제단체들에게 반대논리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반성이었다. 반성해야할 주체들이 반성없이 반대만 했다.

상법 개정 반대를 주도한 자유한국당(옛 새누리당)이나 눈치만 보다 막판에 짜집기 법안하나 내놓고 면피하려한 바른정당은 지난 2012년 대선 때 상법 개정을 약속하며 집권한 세력이다. 당시 그들은 △소액주주 등 비지배주주들이 독립적으로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집중투표제, 전자투표제, 다중대표소송제 단계 도입을 위해 상법을 개정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당시 대선공약은 지금 국회에 제출된 김종인·박용진·채이배·노회찬 의원 등이 제시한 상법 개정안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언제 그런 공약을 제시했느냐는 듯 180도 다른 모습으로 상법 개정 반대에 노골적으로 앞장서왔다.

정부는 어떤가. 대선후 출범한 현 정부는 2013년 7월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당시 입법예고안은 △감사위원 분리 선임 △집중투표·전자투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 도입을 담고 있다. 지금 국회에 제출된 상법 개정안과 글자하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최근 정부는 유일호 부총리가 나서 최근 공개적으로 상법 개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슬그머니 바뀐 입장에 대한 설명이나 사과, 반성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2013년 당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며 상법 개정을 입법예고한 주무부처(법무부) 장관은 현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 국무총리다.

재계로 통칭되는 경제단체들은 어떠했나. 기업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이익단체라는 점에서 그들이 강조한 상법 개정안 우려사안은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 로비단체가 아닌 우리 경제산업 전반의 건전한 민간 싱크탱크로 존중 받으려면 경영권 위협이라는 엄포만 할 것 아니라, 순기능은 철저히 외면하고 부작용만 지나치게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건설적인 지배구조 대안을 함께 내놓는 모습을 보여야했다.

정부나 경제단체나 정경유착에 대한 환골탈태 없이 ‘경영권 위협론’만 설파하는 것은 염치없는 행동이다. 수개월 대한민국과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는 말한다. 우리 기업을 진짜 위기에 빠트리는 핵심 이유가 다중대표소송같은 상법 개정안 문구 하나가 아니라 정경유착, 총수 일가의 경영권 보전을 위해선 어떠한 부당 거래도 마다않겠다는 탐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점을. 반성과 개혁 의지없는 경영권 위협론을 진정성있게 받아들여줄 국민이 몇이나 될까.

가장 최근 한진해운부터 금호·대한전선·웅진·LIG·STX 그리고 싱글라이더의 배경이었던 동양까지. 외환위기 시대도 아닌 21세기에도 여전히 반복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경제를 뒤흔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공중분해시켜버린 대한민국 기업의 흑역사는 무엇에서 비롯됐나. 상법 개정 반대론자들이 한결같이 우려해온 것처럼 외국계투기자본의 경영권 침탈이나 주주들의 경영간섭 때문에 무너진 것이 전혀 아니다. 이들 기업을 침몰시킨 건 경영진의 전횡과 무능, 견제없이 일방 독주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오히려 상법 개정으로 이사회가 정상 작동하고 탐욕과 독주를 제어할 건전한 주주 견제장치가 제대로 마련됐더라면 운명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우리 경제는 특정 집단의 싱글라이더여선 안된다. 반성없는 `경영권 위협론`이야말로 진짜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일이다.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공약집에는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 시스템, 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 도입 방안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행하지 않았다.(자료: 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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