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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박수익 기자] 최근 개봉한 영화 ‘싱글라이더’는 동양그룹 부실채권 사태가 기본 배경이다. 영화는 부실채권을 판매한 증권사 지점장(이병헌)이 무릎을 꿇고 고객에게 사과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영화속이나 현실 속 동양 사태에서 진짜 무릎을 꿇어야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현실의 출발점은 순환출자라는 기형적 지배구조 속에 감춰진 동양그룹 부실이었다. 부실을 감추고 현재현 회장의 경영권을 보위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계열사가 동원됐고, 계열사들은 개인투자자들에 부실채권(회사채·CP)을 떠넘겼다. 이미 동양 계열사들은 빌린 돈의 이자도 내지 못하는 부도 직전 상황이었지만 개인투자자들로부터 부실채권을 팔아서 쓸어모은 돈으로 다시 계열사 주식을 사는 등 자신들의 지배력 유지에만 골몰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뜻있는 인사들은 더 이상 이렇게 회사를 운영해선 안 된다는 직언을 그룹 최고위층에 전달했으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듯 되려 직언자들이 회사를 떠나야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2월 임시국회에서 끝내 상법 개정안 처리가 무산됐다. 지난 수개월 상법 개정안을 둘러싼 흐름은 ‘외국자본의 경영권 침탈’ ‘대기업 죽이기’와 같은 강경 반대논리가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찬성논리를 압도했다. 반대논리나 부작용, 법리적 논쟁 하나 없이 완벽한 법은 없기에 법안을 둘러싼 찬반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에 앞장 선 정부·여당 그리고 재계로 통칭되는 경제단체들에게 반대논리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반성이었다. 반성해야할 주체들이 반성없이 반대만 했다.
정부는 어떤가. 대선후 출범한 현 정부는 2013년 7월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당시 입법예고안은 △감사위원 분리 선임 △집중투표·전자투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 도입을 담고 있다. 지금 국회에 제출된 상법 개정안과 글자하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최근 정부는 유일호 부총리가 나서 최근 공개적으로 상법 개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슬그머니 바뀐 입장에 대한 설명이나 사과, 반성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2013년 당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며 상법 개정을 입법예고한 주무부처(법무부) 장관은 현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 국무총리다.
재계로 통칭되는 경제단체들은 어떠했나. 기업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이익단체라는 점에서 그들이 강조한 상법 개정안 우려사안은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 로비단체가 아닌 우리 경제산업 전반의 건전한 민간 싱크탱크로 존중 받으려면 경영권 위협이라는 엄포만 할 것 아니라, 순기능은 철저히 외면하고 부작용만 지나치게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건설적인 지배구조 대안을 함께 내놓는 모습을 보여야했다.
가장 최근 한진해운부터 금호·대한전선·웅진·LIG·STX 그리고 싱글라이더의 배경이었던 동양까지. 외환위기 시대도 아닌 21세기에도 여전히 반복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경제를 뒤흔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공중분해시켜버린 대한민국 기업의 흑역사는 무엇에서 비롯됐나. 상법 개정 반대론자들이 한결같이 우려해온 것처럼 외국계투기자본의 경영권 침탈이나 주주들의 경영간섭 때문에 무너진 것이 전혀 아니다. 이들 기업을 침몰시킨 건 경영진의 전횡과 무능, 견제없이 일방 독주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오히려 상법 개정으로 이사회가 정상 작동하고 탐욕과 독주를 제어할 건전한 주주 견제장치가 제대로 마련됐더라면 운명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우리 경제는 특정 집단의 싱글라이더여선 안된다. 반성없는 `경영권 위협론`이야말로 진짜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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