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내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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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영화평론가] 에단 호크, 샐리 호킨스 주연의 영화 ‘내 사랑’은 ‘모디, Maudie’가 원제다. 이 영화는 원래 제목이 낫다. 아니 사실은 그거대로 해야 옳았다. 영화의 느낌이 보다 올바르게 전달된다. 국내 배급사가 흥행을 위해서인지 제목을 지나치게 ‘연애’에 맞춘 셈이다. 주연 배우도 에단 호크는 뒤로 가는 게 맞다. 해외 배급은 그렇게 됐을 것이다. 이 영화는 여주인공 모드 루이스 역을 맡은 샐리 호킨스에 의한, 그녀를 위한, 그녀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귀여운 속임수이다. 상술(商術)이다. 작금의 극장 환경에서는 고육지책 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관객이 화낼 만한 수위까지는 아니라는 얘기다.
영화는 어울리지 않는 두 남녀 모드와 에버렛의 사랑(장애가 있는 아티스트 여자와 하층 계급 남자의 사랑, 혹은 요즘 유행하는 중산층 여자와 블루 컬러 남자의 결합 같은 느낌)으로 포장돼 있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이건 올 곧이 한 여성의 눈물겨운 자기애(自己愛)를 그린 작품이다. 모드라는 여성 화가가 얼마나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 갔으며 그로 인해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이 여전히 얼마나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가를 보여 주는, 성찰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캐나다 출신의 나이브 화가(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자신의 미술 세계를 이루어 낸 작가들을 일컫는 말이다) 모드 루이스의 생을 담는다. 선천성 관절염으로 평생을 불편한 육신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는 불우했던 삶을 딛고 예술가로서 성공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아니, 그 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자족(自足)의 삶을 어떻게 체득(體得)해 갔는지를 채취(採取)헤 나간다. 그 과정에서 마을 생선 장수였던 에버렛 루이스와 같이 살게 되고, 결혼에 이르며, 영혼을 나누게 되는 일 등등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지엽(枝葉)이다. 제대로 걸을 수 없었던 모드가 자신의 걷는 모습 마냥 세상을 비뚜로 봤다면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그림 속 풍경처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자신을 학대하고 멸시했던 허드레 일꾼 에버렛도 결코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부족한 삶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인생과 세상 자체를 모드 루이스가 얼마나 지극히 사랑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힘, 그 원천은 바로 그 같은 긍정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진솔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의 안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세상의 심연을 바라 볼 용기를 얻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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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모드의 사랑은 꽤나 주체적이고 여성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에버렛을 만난 순간부터 그에게 그리 꿀리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 살아 가는 에버렛의 가정부로 들어 간다. 고아로 자란 에버렛은 세상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이런 사람일수록 이기적이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동정하기 보다 경멸한다. 그런 그에게 모드는 가정부 일을 해 주는 대가로 먹고 자게 해 주는 것 말고도 주 25센트를 요구한다. 스스로 최소한의 존엄성, 그 관계를 만들어 나가려는 모드 식의 방법인 셈이다. 여자는 결국 거칠고 무지한 남자의 인생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방이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한 침대에서의 생활을 강요(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일종의 강요에 가깝다)하는 에버렛에게 모드는 결혼하지 않으려면 자신과 몸을 섞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에버렛은 애초부터 마음속에서는 식모 겸 ‘몸 받이’를 원했을 것이다. 모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에버렛의 ‘섹스 슬레이브’라고 부르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더욱 그런 그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녀의 요구대로 그가 결혼을 하게 만든다. 모드 루이스는 에버렛을 이끈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주도하는 것은 모드다. 그녀는 남자에게 평등한 인간관계, 그리고 가정을 선사한다.
한편으로 ‘내 사랑’의 한 축은 한 여자 아티스트의 특이한 성공담에 쏠려 있다.하지만 찬찬히 뜯어 보면 실은 그것마저도 아니다. 모드의 그림이 세세하게, 전문적으로 얘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방점은 딴 데 찍혀 있다. 삶은 어쩌면 대단한 예술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예술 역시 엄청난 돈이 아니다. 그리고 돈은 결코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 가면서 이 어리석은 쳇바퀴를 돌려 대려 애쓴다. 인생은 돈이 전부라고 떠들어 대며, 그저 돈만 되는 예술만 생각하고, 돈만 추구하며, 돈만 좋아하고 그래서 결국 돈,돈,돈 하면서 살아 간다. 이 영화 ‘내 사랑’은 그 반대를 보여 주려 한다. 삶은 단순한 것이고 예술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사(模寫)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 평화롭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사랑’은 마치 ‘작고 적은 삶’을 추구했던 헨리 소로의 에세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지만 깊은 공명(共鳴)을 준다는 것은 이런 느낌에서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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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주변 사람들이 모드에게 궁금해하듯 그녀가 그리는 그림, 그 영감의 원천은 또 한편으로는 바로 자연, 환경, 그리고 인생 그 자체였다. 바로 그걸 보여 주려는 듯 에이슬링 월시 감독은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의 자연을 광각의 렌즈로 담아 내는데 주력한다. ‘내 사랑’의 주인공은 모드 루이스이자 동시에 대자연이다. 노바스코샤의 작은 마을인 마셜 타운과 인근 바닷가인 딕비의 모습이 비교적 촘촘히 소개되는 건 그 때문이다. 대 평원과 황량한 시골 길, 어촌의 심심한 풍경들이 영화 중간 중간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여 주려는 듯 정지 커트로 그려진다. 이건 두 사람이 사는 작은 오두막의 내부와 종종 대비되곤 하는데 그건 그 둘의 불균형과 비대칭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드의 삶과 그녀의 예술이 그 안에 있음을, 자연과 하나임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모드의 그림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되는 사람일지라도 영화 속 풍경만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림과 자연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야말로 그녀의 그림을 미국 뉴욕과 세계에 알려지게 한 요소다. 늘 그렇듯이 작은 우주가 큰 우주의 질서를 얘기하고 그 본질을 궤 뚫는 법이다. ‘내 사랑’은 작은 어촌 마을의 보잘 것 없는, 불구의 한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우리 삶의 중앙으로 파고든다. 영화는 모드 루이스를 위한 친절하고 작은 미술관이지만 그보다 더 큰 파급의 힘을 보여준다.
‘내 사랑’은 정치경제사회학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대사회에 말 그대로 천사의 마음과 그 손길을 전달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영화다. 상심과 상실의 마음에 위로의 단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여인, 모드 루이스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처럼 독특한 그림을 그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캐나다 저 어느 구석에 모드와 같은 자연의 화가가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삶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애쓴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위안을 얻게 된다. 자신들의 지옥같은 삶에도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삶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 ‘내 사랑’이 조용히 흥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세상사에는 다 그만한 이유들이 있는 법이다.
◇[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은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함께합니다.
글을 쓴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상세하다 못해 깨알과 같은 컨텍스트(context) 비평을 꿈꿉니다. 그의 영화 얘기가 너무 자세해서 읽는 이들이 듣다 듣다 외치는 말, ‘닥쳐라! 영화평론’. 그 말은 오동진에게 오히려 칭찬의 글입니다. 윗글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닥쳐라!’ 댓글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