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수자 혐오표현 문제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의혹이 불거지면서 서비스를 전격 중단한 챗봇 이루다 논란을 보면서 <블랙미러>의 인공지능 애쉬가 떠올랐다. 드라마를 볼 때는 설마 저런 일이 벌어지겠어 했지만, 그것이 그리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챗봇 이루다 논란이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 이루다는 20대 여성이고 대학생이라는 캐릭터를 갖고 있고 마치 ‘사람처럼’ 질문에 답하지만 그건 결국 ‘잔물결’일 뿐이다.
그런데 이 논란에서 놀라웠던 건 마치 이루다를 진짜 인격체인 양 다루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애초 20대 여성 콘셉트를 세울 때부터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긴 하지만, 일부 유저들이 이루다를 성적 대상화하는 일이 벌어진 점과 그것을 ‘성추행’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물론 그 행위 자체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성추행’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말 속에는 이루다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본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루다가 ‘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한 논란 역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것이 ‘혐오 발언들로 편향된 데이터’의 결과이지, 이루다라는 인격체(?)가 한 혐오 발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활용했다는 데서 오는 분노에는, 개개인들이 어떤 순간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에 담겨진 그들만의 감정이나 느낌, 기억들이 납작한 데이터로 활용됨으로써 그 사적 경험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로봇 애쉬에 마사가 화가 난 건 바로 그 점이 아니었을까. 애쉬처럼 행동하고 말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는 납작한 데이터의 재현일 뿐이라는 사실이 주는 불쾌함. 그건 마사가 애쉬 생전에 함께 지냈던 삶에 대한 차별적이고 독특한 기억들을 기계적인 어떤 것으로 오염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통한 ‘재현’의 문제는 이제 방송가에서도 더 이상 SF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작년 2월 MBC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는 4년 전 세상을 떠난 7살 아이 나연이를 VR을 통해 다시 만나는 엄마 장지성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를 위해 나연이의 사진과 영상, 음성 데이터들을 활용해 ‘가상의 나연이’를 만들었고, 엄마는 잠깐 동안 그 가상현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나연이와 시간을 보냈다. 애끓는 엄마의 감정은 그 가상을 실제처럼 느끼게 만들었고, 엄마는 그 경험을 통해 나연이와의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물론 이 사례는 남은 자를 위한 배려일 수 있고, 또 다른 휴머니즘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만일 이런 일이 상용화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저 마사가 결국 겪게 되는 더 큰 절망감을 마주할 수 있고, 무엇보다 고인의 ‘잊힐 권리’ 또한 무시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인공지능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고 대중문화는 아마도 이러한 새로운 기술을 대중들에게 스며들게 만드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분야일 것이다. 이루다 논란이 끄집어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기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 투영되고 선택되는 우리 사회의 문화들은 향후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우리의 삶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쩌면 허구와 가상이 꾸며내는 진짜인 척 하는 가짜들은 진짜에 대한 기억이나 느낌 같은 인간적인 요소들을 파괴하는 것일지도. 그러니 그 잔물결에 휘둘리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