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의심(疑心)이 주인공인 연극이다. “여러분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열리는 극단 실험극장의 ‘다우트’(Doubt·연출 최용훈). 이 대사는 주술이나 바이러스 같아서, 관객은 금방 걸려들었다. 120분 동안 줄기차게 의심을 퍼나르는 무대. 확신보다 더 강하고 질기게 우리와 얽혀 있는 건 의심이라고, 이 연극은 단언한다.
1964년 미국의 한 가톨릭 학교가 배경이다. 믿음으로 뭉쳐졌을 것 같은 공간이지만 교장인 엘로이셔스 수녀(김혜자)는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플린 신부(박지일)의 부적절한 행동을 의심한다. 플린이 어린 흑인 남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다.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 엘로이셔스는 젊은 제임스 수녀(윤다경)와 함께 플린을 몰아낼 시나리오를 행동으로 옮긴다.
초반에 엘로이셔스는 김혜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작게 느껴졌고 목소리가 낮았다. 움직임도 거의 없어 단조로운 정물화 느낌까지 줬다. “볼펜 때문에 정확한 필기법이 죽어가고 있다” “만족은 악덕이다” “순진함은 게으름의 일종이다” 등 차가운 직선형 대사가 쌓이면서 어느 순간, 그 자리엔 김혜자가 아닌 엘로이셔스가 서 있었다. 흩어지는 마른 모래 같은 음성에 인물은 더 잘 살아났다.
‘다우트’는 지난해 미국에서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양손에 쥔 존 패트릭 쉔리의 작품이다. 못을 친 자리가 안 보일 만큼 잘 짜인 집 같은 드라마는 긴장·이완의 리듬감을 보여줬다. 교장실에서 찻잔과 수첩을 각각 든 채 심리싸움을 하는 엘로이셔스와 플린, 농구공이나 베개에 빗대 상황을 위트 있게 정리하는 플린,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 제임스까지 존재감이 또렷했다. 심문과 반론이라는 법정 드라마 형식을 빌렸지만 유머를 잃지 않았고, 객석엔 부드러운 웃음이 맴돌았다.
의심의 끝은? 없다. 확실성을 경멸하고 불확실성에 매달리는 이 연극은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관객은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굳었던 것들이 어지러이 일어나는 감정을 체험한다. 가장 불안했던 사람은 5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김혜자였을지도 모른다. 커튼콜 때 김혜자는 웃었다. 5일 개막 무대에서 그가 웃은 딱 한 순간이었다. ▶14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하루 2회 공연. (02)889-35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