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용익의 록코노믹스]한국은 어쩌다 록의 불모지가 됐나

  • 등록 2020-10-03 오전 10:03:47

    수정 2020-10-03 오전 10:03:47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지난 2010년 8월 10일,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한 서점에서 메가데스(Megadeth)의 리더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과 잠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 메가데스는 12집 ‘Endgame’ 투어에 이어 ‘Rust in Peace’ 앨범 발매 20주년 투어로 바쁜 시기였지만, 내한공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한국 방문 계획을 묻자 머스테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안 그래도 에이전시와 얘기 중인데, 잘…”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결국 메가데스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

앞서 메가데스는 1998년, 2000년, 2001년, 2007년, 총 네 차례에 걸쳐 내한공연을 했다.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은 밴드가 수두룩한 가운데 메가데스의 내한공연은 결코 적은 횟수는 아니다. 하지만 이후로 10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일본은 수시로 가고 중국 공연까지 하면서 한국에 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록 음악이 인기를 끌지 못하는 나라도 드물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록 음악이 유독 한국에서 푸대접을 받는 현상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헤비메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머리 긴 남자들이 하는 시끄러운 음악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한국이 처음부터 록 음악의 불모지는 아니었다. 대중음악사를 살펴보면, 한국은 오히려 록의 태동기 때부터 영미권과 호흡을 같이 했다.

1950년대 주한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하던 뮤지션들은 1960년대부터 대중음악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미 8군 연예단 출신 신중현이 대표적이다. 그는 1962년 한국 최초의 록 밴드 에드 포(Add 4)를 결성하고 “빗속의 여인”을 발표했다. 비틀즈(The Beatles)가 영국에서 본격적인 록의 시대를 열었을 당시 이미 한국에도 그럴듯한 록 밴드가 존재했다는 얘기다. 신중현은 1970년대에도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미인”을 발표했고, 당대 최고 스타 김추자를 발굴하며 트로트 일색이었던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었다.

1960~1970년대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은 ‘음악 다방’을 통해 팝송과 함께 다양한 해외 록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가요계에서도 록 밴드가 연주하는 ‘탈(脫) 트로트’ 노래들이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록 음악이 한국에 뿌리를 내릴 무렵 대형 악재가 발생한다. 1975년 ‘록의 대부’ 신중현을 비롯해 포크 록 뮤지션인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등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커들은 ‘약쟁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됐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1980년대 들어선 들국화의 전인권과 부활의 이승철, 1990년대에는 신성우, 신해철 등이 대마초 혐의로 구속되면서 록 뮤지션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심지어 로커의 상징과도 같은 장발은 1970년대엔 단속 대상이었고, 1990년대 말까지도 공영방송인 KBS에는 머리를 뒤로 묶고 출연해야 했다.

그나마 1980년대는 한국에서도 록 음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이다. 그 당시처럼 밴드 뮤직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때는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한 번도 없었다. 송골매, 들국화, 부활 같은 록 밴드들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결성한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 트로트 가수에서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 전향한 유현상의 백두산은 TV 가요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정도였다.

특히 1980년대 말에는 한국 헤비메탈의 저변이 본격적으로 확대됐다.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이 1988년 발표한 데뷔 앨범 ‘Fatal Attraction’은 그동안 한국 밴드의 음악을 은근히 무시하던 리스너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시나위 등 먼저 데뷔한 헤비메탈 밴드들이 다분히 한국적인 사운드를 들려준 반면, 블랙 신드롬의 음악은 마치 미국이나 영국의 정통 헤비메탈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려 일으켰기 때문이다.

같은 해 발매된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컴필레이션 앨범 ‘Friday Afternoon’에는 블랙 신드롬 외에도 미국적인 글램메탈을 연주하는 크라티아(Cratia), 한국 최초의 스래시메탈 밴드 아발란시(Avalanche) 등 해외 음악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밴드들이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만약 그 당시 자본력이나 유통망 같은 여건만 조성됐더라면,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은 K팝에 훨씬 앞서 K메탈의 시대를 열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은 없다. 199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헤비메탈의 인기가 식으면서 한국의 밴드 뮤직도 영향을 받게 됐다. 때마침 유명 록·메탈 밴드 보컬리스트들의 솔로 전향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핵심 멤버의 이탈은 밴드의 활동 중단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는 록 음악의 요소를 가미한 가요가 드라마 주제곡 등으로 인기를 얻었고, 시나위 출신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통해 록과 댄스뮤직을 융합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던 스래시메탈 밴드 크래쉬(Crash)는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에 등장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이 시기 록·메탈 음악은 대중에게 더 다가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정통 밴드 중심의 음악은 이때부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록이 한국에서 부흥할 수 있는 기회는 또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홍대 앞 클럽을 중심으로 이른바 ‘인디 밴드’들이 활발한 공연 활동을 했다. 크라잉 넛(Crying Nut), 노브레인(No Brain) 등 펑크 밴드들과 델리스파이스(Delispice), 언니네이발관 등 모던록 밴드들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부류에 속한다. 언론도 인디 밴드 신을 주목했다.

하지만 2005년 7월 30일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 출연한 럭스(Rux)의 공연 도중 카우치(Couch)와 스파이키 브랫츠(Spiky Brats)의 멤버가 성기를 노출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디 밴드 전체에 불똥이 튀었다. 이후 경찰은 클럽에서 성기 노출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했고, 결국 사회적으로 록 음악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줬다. 약쟁이들의 음악이라는 평가에 이어 변태들이 하는 음악이라는 인식까지 생긴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록의 위치는 멜론 차트를 보면 알 수 있다. 2020년 9월 한 달 간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음원 가운데 록이라고 할만한 노래는 단 한 곡도 없다. 댄스, 힙합, 발라드, 아니면 트로트다. 록 음악의 부재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한국 땅에서 록이 사라진 건 아니다. 헤비메탈도 여전히 건재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멤버 교체는 여러 번 겪었지만, 블랙 신드롬과 크라티아는 물론 ‘Friday Afternoon’ 2집(1989년)과 3집(1990년)을 통해 데뷔한 제로 지(Zero G), 크럭스(Crux) 등은 2020년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디아블로(Diablo), 메써드(Method), 해머링(Hammering) 등 비교적 뒤에 데뷔한 밴드들의 활동도 꾸준하다.

혹자는 현재 한국의 헤비메탈 신이 1980년대만큼이나 활발하다고 평가한다. 안타깝게도, 음원을 듣고 공연을 보는 사람이 드물 뿐이다.

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 1위를 차지하면서 K팝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K록, K메탈에도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방탄소년단 (사진=빅히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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