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5년차 회사원 황모(36·여)씨는 이달 초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이번 설 연휴 시댁에 가지않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추석 남편과 크게 싸운 탓이다. 사상 최장이었던 열흘짜리 추석 황금연휴 당시 황씨는 시댁에는 3일을 머물고 나머지 기간은 친정에 들렀다가 남편과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친정 갈 생각만 한다고 서운해 했고 남편도 시어머니 편을 들었다. 결국 황씨는 여행은 커녕 친정조차 가지 못하고 긴 연휴를 시댁에서 보내야 했다.
황씨는 “더 이상 참고 살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이번 설연휴는 내내 친정에 머물면서 친정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B급 며느리’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명절이면 시댁의 잡일꾼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행복한 ‘B급 며느리’ 선언 잇따라
영화 ‘B급 며느리’는 명절을 앞두고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고부갈등을 4년에 걸쳐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가 최근 설 연휴를 앞두고 상영 역주행 중이다. 개봉일인 지난달 17일 47곳뿐이었던 상영관이 설 연휴를 앞둔 지난 8일 58곳으로 늘었다. 지난 10일에는 누적 관객 수 1만명을 돌파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겪는 실제 갈등 상황과 장면들, 며느리의 역할과 의무만 강조하는 가부장적 가족 문화를 재치있게 꼬집어 여성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낸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5월 페이스북 연재로 시작해 출간까지 한 웹툰 ‘며느라기’ 역시 한국의 며느리가 겪는 현실들을 조명해 인기를 끌었다. 이 웹툰은 직장 여성이 결혼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들을 담았다. 매년 제사 때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보며 “고생은 무슨, 매년 하는 일인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시아버지, “내가 무뚝뚝하니 나 대신 네가 부모님을 챙겨달라”는 남편 등 아내의 입장에선 서늘하기만 한 장면을 담담히 묘사해 공감을 얻었다. ‘며느라기’ 페이스북 팔로워 수는 22만 5000여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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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6년차 양모(37·여)씨는 “이번 연휴엔 해외여행을 가기로 남편과 합의했다”며 “그간 명절마다 음식준비와 함께 ‘아이 가져라’, ‘남편 밥 좀 잘 챙겨줘라’ 시댁 식구들 잔소리에 시달렸다. 견디기 힘들어 이번 설에는 남편과 여행을 떠나겠다고 시댁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변화가 여성의 인권과 권리 신장에 대한 관심 증가와 전통적 가족 공동체 문화의 붕괴가 맞물려 빚어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폭력, 성차별 등 가부장제가 만든 공적 제도에 집중되어 있던 관심이 최근 들어서는 일상 속 성차별과 남녀 간 성역할 인식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는 추세”라며 “‘B급 며느리’나 ‘며느라기’, ‘82년생 김지영’ 등 일상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을 다룬 재현물들이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통적 가족 공동체의 해체, 가부장제 문화에 대한 의구심 두가지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며 “전통적 가부장제 문화가 익숙한 기성세대가 부모님 세대로 자리잡아 젊은 세대와 갈등을 겪고 있다. 사실 부모님 세대도 가부장제 문화의 피해자다. 이럴수록 기성세대와 젊은세대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끊임없는 대화로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다원 시월드리더십아카데미 원장은 “명절 전후 부부갈등, 고부갈등을 특수한 상황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확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가부장제가 극심하던 시절 결혼 생활을 겪은 시어머니들이 생각하는 시집살이와 젊은 세대 며느리들이 느끼는 시집살이가 달라서 갈등이 발생한다. 결혼 제도의 형식적 변화 속도는 빠른데 그를 뒷받침하는 인식의 변화가 더뎌서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서로가 이해하려면 며느리들은 목소리를 내고 시어머니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