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문한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Quantico)에 위치한 미 연방수사국(FBI) 연구소. FBI의 증거수집팀 요원인 톰 린트너(Lintner)는 모니터가 장착된 일명 007 가방에서 특수렌즈가 달린 전선을 꺼냈다. 마이크로바이퍼(Microviper)로 불리는 이 장치를 연구소 바닥의 카펫에 갖다 대자 100배로 확대된 영상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그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확대해 보니 흠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리트너 요원은 “사건 현장의 증거물을 FBI연구소로 가져가 심층조사를 할 것인지를 즉각 판단할 수 있어 예산낭비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팀의 여자 요원은 미국의 TV 드라마 ‘CSI’ 에서 볼 수 있는 장비를 실연했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신문지에 특수 은박지를 붙이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범인의 신발자국이 드러났다. 과학수사의 대명사인 FBI는 최근 워싱턴 주재 외국 기자들이 FBI연구소와 FBI훈련원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2년 만에 마련했다. 프랑스·러시아·일본 등 20여명의 워싱턴주재 특파원이 참가한 이날 취재에 한국 기자로는 유일하게 참석했다.
워싱턴DC 남쪽의 미 해병대 기지 내에 자리잡고 있는 FBI연구소와 FBI훈련원은 워싱턴의 본부와 함께 3대 핵심시설로 꼽힌다. 2003년 신축된 FBI연구소가 한국 언론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걸려 도착한 FBI 시설의 출입구에서는 ‘100% 신분증 검사’라는 문구가 기자들을 맞았다. FBI연구소 취재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됐다. 특파원은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모두 버스에 남겨 둔 후에야 연구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연구소 1층에서 기자들을 맞은 것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3년 연구소를 방문한 당시의 대형 사진이었다. 국회의사당 크기의 6층짜리 건물 3개가 연결된 초대형 연구소엔 6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연간 5조원이라는 FBI 예산의 상당부분을 사용하는 이 연구소 직원의 90%는 주로 과학을 전공한 전문직이고, 10%가 FBI 요원이다.
FBI연구소는 미국의 각 주정부와 연결, 범죄자의 유전자(DNA) 조사를 실시간으로 실시하는 코디스(CODIS)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 시스템에는 400만명의 DNA 자료가 축적돼 있다. 각 층엔 수억원대의 DNA 감식시스템, 화학실험기구가 즐비했다.
연구소 부국장 멜리사 스머즈(Smerz)는 4층의 화학실험실을 설명하던 도중 “여러분의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기계들이 5억~6억원”이라고 말했다. FBI 는 이런 첨단장치에 힘입어 지난해 총 33만2689건의 감식을 실시했다.
3층의 총기실험실은 기자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곳 중 하나였다. 총 6000개의 총기류가 나란히 진열돼 있다. 영화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있던 지팡이 권총, 우산 권총, 기타를 이용한 권총을 실제로 볼 수 있다. 볼펜 크기의 특수권총도 눈에 띄었다. 복도엔 약 30m 간격으로 천장에 긴급세척장치가 설치돼 있다. 연구소에서 위험한 화학물질, 폭발물을 다루다가 신체가 오염될 경우 즉각 손잡이를 잡아당겨 세척할 수 있도록 한 장치다. 비상약도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출입구마다 놓여 있다.
FBI훈련원 취재는 공짜가 아니었다. 기자는 식당에서 8달러50센트를 내고 치즈버거, 감자로 점심식사를 했다.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식당에는 전문가 교육을 받기 위해서 온 중년의 남녀 경찰관들이 눈에 띄었다. 함께 식사를 한 FBI의 홍보담당관 필립 에드니(Edney)는 “ 9·11 사건 이후에 테러리즘 예방에 더 많은 신경을 써서 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FBI교육생에 대한 개별접촉은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FBI에 요청해서 받은 사진에도 철저히 FBI요원의 얼굴이 감춰져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FBI교육생은 한결같이 짧은 머리에 허리엔 파란색 모형 권총을 차고 있었다. 커드 크로퍼드(Crawford) 공보관은 “교육생은 21주의 임용교육에서 최소한 2개의 총을 다루는 방법을 숙달해야만 졸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총기 보유가 합법인 미국에서 사격을 하지 못하는 FBI 요원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를 강조하듯 FBI아카데미 1층의 총기고 앞에는 60발을 한 발도 빠짐없이 명중시킨 이들만이 가입하는 ‘특등사수클럽’ 회원 명단이 걸려 있었다.
훈련원에 입소한 FBI요원의 평균 연령은 30세. 평균 초임은 약 6만달러이며, 지난해에는 3만명이 응모한 가운데 8000명을 선발했다. FBI 훈련원 곳곳에서 48년간 FBI 국장을 역임한 에드가 후버(Hoover)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FBI의 기틀을 잡은 후버 전 국장은 복도, 도서관, FBI 명예의전당에서 대형 초상화, 흉판의 모습으로 기념되고 있다.
이날 FBI 훈련원을 둘러본 후 FBI 관계자에게 물었다. “중앙정보국(CIA)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느냐.” FBI 관계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갈등은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의의 경쟁을 위한 건전한 갈등이다.” 마치 준비된 듯한 답변이었다.
이날 오후, 잠시도 쉴 틈 없이 진행된 브리핑과 취재가 끝나 버스에서 기자들이 한숨을 돌릴 때, 이날 안내한 FBI관계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이 잠들기 전에 한 가지 알려주겠다. FBI 가 2003년부터 국제사회와 협력한 사안은 총 54건이라고 한다. 참고하기 바란다.”
기자가 오전에 FBI연구소에서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서울에서 별 것도 아닌 통계자료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곤 하던 것을 생각하며, 흔들리는 워싱턴행 버스 속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