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설은 안녕하십니까]시댁에서 남편은 내편 아닌 '남의 편'

집안일 공동 분담하던 남편, 명절 때면 돌변해
남편에 "부엌에 얼씬도 말라"는 시댁 식구들 괘씸
시댁서 부엌데기인 나도 우리집에선 귀한 딸 억울
  • 등록 2018-02-15 오전 10:00:00

    수정 2018-02-15 오전 10:00:00

[이데일리 김보영 기자] 평소 나와 남편은 사이가 좋은 편이다. 결혼할 때부터 맞벌이를 해온 터라 집안일은 늘 합의하에 분담한다. 요리를 좋아하는 내가 음식을 만들면 뒷정리는 남편이 한다. 빨래와 청소, 분리수거 등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늘 내가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불만이지만, 남편은 시아버지에 비하면 자신은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이라며 늘 큰소리다. 뭐 이 정도는 애교로 봐주면서 나름 사이좋게 살고 있다.

그러나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 때면 부부싸움이 어김없이 벌어진다. 명절스트레스는 시어머니의 카카오톡 메시지로 시작한다. 명절 일주일 전이면 어머님은 어김없이 “이번 명절 땐 어떤 메뉴로 할까?”라고 메시지를 보내신다. 남편과 시부모님 모두 있는 단체 대화방도 있는데 굳이 개인톡으로 물어보신다.

명절 전날 어머님이 주문하신 음식재료를 들고 시댁을 찾으면 두통이 찾아온다. 손수 앞치마부터 둘러주시는 우리 어머님. 과거 어머님의 시집살이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전을 부친다.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예전엔 며느리들이 어떻게 참고 살았나 모르겠다. 전을 부치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니 허리가 뻐근하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며 괜히 주변을 맴돈다. 어머님은 남편이 부엌에 들어서자 방해하지 말고 나가라며 등을 떠민다. 아니 자기들 조상 제사상 준비하는데 왜 본인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성씨 다른 늙고 젊은 며느리들만 뼛골이 빠지는 지 알수가 없다.

지난 명절에는 시할머님을 뵈려 대구로 향했다. 아흔이 넘으신 시할머님은 내 손을 꼭 잡고는 “아가야, 우리 손주 절대 부엌에 들어오게 하지 말아라. 남자가 부엌에 자꾸 드나들면 딸 낳는단다”라고 당부하셨다. 너무 간절히 말씀하셔서 뭐라 답할 지 말문이 막힌다. “할머님, 요즘은 아들보단 딸이 귀해요.”라고 받아치고 싶은걸 꾹 참았다.

시할머님댁에선 명절 당일에만 30명의 친척들이 들고 났다. 차례를 드리고 아침상을 차릴 때 보니 남자들이 앉는 상과 여자들이 앉는 상은 나뉘어 있다. 남자들은 거실에 모여앉아 영혼없이 TV만 바라보다 밥상이 차려지면 그제야 자리를 옮긴다. 남자들 밥상에서 ‘이거 가져와라, 저거 더 달라’ 주문이 들어오면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는 건 나다. 막내 손주 며느리인 탓이다.

“우리 손주, 얼굴이 핼쑥해졌네. 새아기가 아침밥 안해 주드나?”

“어머 그러게, 우리 조카가 피죽도 못얻어 먹나보네.”

슬쩍 대화를 엿들으니 이런 말들이 오간다. 아니 도대체 남편이 살이 빠진게 왜 내탓이란 말인가. 내가 살이 빠지면 아무도 남편 탓을 안하던데.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고 밥 한 숟가락 뜨려고 앉았더니 남자들 상에 후식을 내 가란다. 과일을 깎고 커피를 탄다. 어떻게 먹었는지 밥 한술을 뜨고 나니 산처럼 쌓인 설거지 더미가 기다린다. 설거지가 끝나고 나니 내 앞에 남은 건 먹다남은 과일들 뿐이다. 나도 우리집에선 귀한 딸인데.

남편은 시댁만 오면 멍청이가 된다. 이런 말에도 그저 허허허, 저런 말에도 허허허 그저 웃는다. 남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다. 시댁에서 며느리는 외롭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상태에서 친정이 있는 서울로 향한다. 싸움은 이때부터다. 처음엔 내 눈치를 보던 남편이 어느 순간 “야, 우리 엄마는 너보다 더 심했어. 다들 그러고 살아! 왜 너만 유난이야”라고 맞불을 놓는다. 결국 고성이 오가고 남편이 운전하는 차안에서 나는 창 밖만 바라 본다.

얼마전 결혼한 친구는 이번 명절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해외로 가족여행을 간다. 시아버지가 호텔예약까지 다 끝내놨다고 자랑이다. 부러울 뿐이다. 다른 친구는 시댁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명절에 시댁식구들과 외식을 한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린 결과란다. 나 혼자만 조선시대에 사는 기분이다. 왜 이런 집에 시집을 왔을까. 친정가는 길이 서럽기만 하다.

[편집자주]이 기사는 30대 기혼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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