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rd WWEF]"관계의 시작은 자존감..내가 소중해야 남도 소중하죠"

뇌성마비 극복 정유선 美조지메이슨대 교수
"지금의 삶 부정하기 보단 현재에 감사해"
"다 잘 할 순 없어..어떤 관계인지 구별 필요"
  • 등록 2014-10-10 오전 8:12:14

    수정 2014-10-10 오전 8:28:57

[이데일리 염지현 기자] “유선아, 잘했다”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주는 사람. 2004년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한국인 중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정유선 조지메이슨대 교수다.

누군가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정 교수의 말은 엄마, 아내, 팀장, 며느리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압박감에 짓눌리는 여성들에게 단비와도 같은 조언이 아닐까.

자신감으로 가득 차 보이는 정 교수에게도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두 살 때 얻은 뇌성마비로 일상적인 대화도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완대체 의사소통(AAC) 기기를 사용해 소통을 하지만 초등학생 시절에는 일그러진 표정과 부정확한 발음으로 웃음거리가 된 후 친구들 앞에서 발표도 하지 못했던 ‘열외’ 학생이었다.

그러나 지난 2012년 그는 학생 수 약 3만2000명의 공립대인 조지메이슨대에서 학생들이 추천하고, 교수들이 최종 심사를 하는 ‘최고 교수상’을 받았
다. 제3회 세계여성경제포럼에 연사로 참석하는 정 교수에게 장애와 사람, 남들보다 두 배는 어려웠을 세상과의 관계 속에 두려움을 어떻게 떨쳐낼 수 있었는지 들어봤다.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관계의 시작은 ‘자존감’

정 교수를 알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 김희선 씨는 1960년대 ‘울릉도 트위스트’로 인기를 모았던 ‘이시스터즈’의 멤버다.

김 씨는 70년대 초 장애인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시절, 어린 딸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 비장애인과 사귀게 하고, 어디서나 당당하게 딸을 소개시켰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유선이는 학같이 우아한 여인이야’ 등 부모님은 오글거리는 과장된 표현을 자주 해주셨어요. 제가 남들과 관계를 맺을 때 두려움을 떨쳐내고 먼저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자신감과 넘치는 사랑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이런 자신감은 여자로서 몸이 불편한데도 교수, 아내, 엄마, 작가 등 여러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내는데 원동력이 됐다.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자면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지만 정 교수는 최근 성당 핸드벨 팀에까지 들어갔다. 다양한 관계를 맺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압박감을 느껴온 여성들이 보기에는 신기한 일이다. 그는 “본인이 다 끌어안으려 하면서 자기 탓만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여성 특유의 공감 능력은 관계 맺기의 핵심이자 향후 이 사회가 지향해야할 요소입니다. 다만 남성우월주의 사상으로 물든 사회가 여성에게 많은 짐을 떠맡기고 있죠. 여성이 육아, 가사, 직장일 등을 다 하면서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나요? 자책할 게 아니라 한 숨 돌리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때입니다.”

“어떤 관계인지 구분 필요..가족이라도 여유는 줘야”

유별날 만큼 끈끈한 친정 부모님과의 관계는 정 교수에게 풀 수 없는 숙제다. 관계를 맺고 끊을 때 중압감을 받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고 하자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제 경우는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벽이 너무 없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기도 하지만 경계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저의 특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을 감사해야겠지요. 편치 않은 마음도 가져가려 합니다.”

정 교수는 ‘바운더리(Boundaries)’라는 책을 소개하며 관계를 맺을 때 영역을 분명히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즉, 상대방이 가족인지, 친구인지, 일로 만난 사람인지 등을 명확히 한 후 그에 따라 맺고 끊음의 기준을 세우라는 말이다.

“저도 처음에는 남편과의 관계나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이젠 가족도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어느 정도 공간을 두려고 합니다. 일로 맺어진 사람들과는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의 생활에 관심을 보이려 하고, 친구들의 경우에는 무엇이든 경청하려 합니다.”

회사에서도 가족 같은 관계를 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되새겨볼만한 조언이었다.

관계 맺기에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정 교수에게 네트워킹에 뛰어난 여성의 특징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번 여성 포럼에서 들려주기 위해 주위에 사람이 끊이지 않고, 오랜 지기가 많은 네트워킹의 달인에게 직접 물었다고 했다.

“비결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어요. 판단 없이 들어주는 것. 잔소리와 설교하지 않는 것. 내가 소중한 만큼 그 사람도 자신만의 방식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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