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루이비똥!"…흥보 자식들 외침에 '웃음 만발'

[리뷰]국립창극단 '흥보전'
판소리 '흥보가'와 미디어아트의 만남
설치미술가 최정화 참여로 볼거리 '풍성'
익숙한 이야기, 세련된 포장으로 담아
  • 등록 2021-09-17 오전 8:30:38

    수정 2021-09-17 오전 8:30:38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아이고, 내 새끼들도 최고급으로 예쁘고 멋지게 차려 입어야지.” “난 조르지오 알마니!” “난 에르메스, 톰 브라운, 루이비똥!”

지난 15일 개막한 국립창극단 ‘흥보전(展)’ 1막의 한 장면. 제비가 물어다준 씨앗이 자란 박에서 고운 비단이 나오자 무대 앞으로 쪼르르 줄지어선 흥보 자식들이 옷을 해달라며 명품 브랜드를 외친다. 흥보 자식 역을 맡은 객원 아역 배우들의 앙증맞은 연기에 객석에선 웃음이 만발한다.

국립창극단 ‘흥보전’의 한 장면(사진=국립극장)
이뿐만이 아니다. 흥보 가족이 처음 켠 박에서 나온 것은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는 돈’이라고 적힌 황금색 머니건(지폐가 나오는 총),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는 쌀’이라는 이름의 황금색 리모컨이다. 흥부 처가 리모컨을 누르자 무대 뒤 가로 8미터, 세로 5미터 크기의 대형 LED 스크린 2개에서 ‘쌀’이라는 글자가 쏟아져 내린다. 익숙한 흥보 이야기가 세련된 미디어아트와 만난 장면이 신선하다.

‘흥보전’은 국립창극단이 9월 정식 재개관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이는 신작이다. 창극의 독창적 성격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연출가 허규(1934~2000)의 유작 ‘흥보가’(1998)를 원작으로 삼아 연출가 김명곤이 극본과 연출을 맡고,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박승원 음악감독이 작곡과 음악을 담당했다.

사람들에게 친숙한 흥보와 놀부의 이야기가 세련된 무대 미술과 만나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번 공연은 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인 최정화가 무대미술을 총괄하는 시노그래퍼로 참여해 관심을 모았다. 제목 또한 한 편의 전시 같은 무대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흥보전(傳)’이 아닌 ‘흥보전(展)’으로 정했다.

국립창극단 ‘흥보전’의 한 장면(사진=국립극장)
공연의 막을 여는 제비나라 장면부터 화려한 무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대 양옆 LED 스크린에 등장하는 깃털 모양의 영상과 무대 위에서 내려오는 원형 세트가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최정화 작가의 대표작 ‘세기의 선물’을 사용한 영상은 놀부의 탐욕을 보여주는 장면에 등장해 눈을 즐겁게 한다. 제비가 박씨를 물고 흥보 집으로 날아가는 장면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포장은 한층 세련되지만, 그 속에 담긴 알멩이는 판소리 ‘흥보가’에 충실하다. 김 연출은 판소리에 담긴 전통적 가치와 재미, 감동을 지켜내기 위해 원작의 줄거리는 최대한 유지하면서 제비나라와 같은 독창적인 상상력을 가미했다. 김 연출은 “판소리 ‘흥보가’가 고달픈 세상살이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욕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며 “이번 창극은 다양한 인간의 면면을 드러내며 한 번쯤 판타지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익숙한 이야기에 볼거리까지 갖춘 만큼 추석 연휴 기간 명절 분위기를 가득 느낄 만한 전통공연이다. 다만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다. 2막 놀부가 박을 켜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제비마녀들의 장면은 젠더감수성에 예민한 젊은 관객에게는 다소 불편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 이야기를 담은 포장이 지나치게 세련되다 보니 작품과 잘 녹아들지 못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흥보전’은 오는 21일까지 공연한다.

국립창극단 ‘흥보전’의 한 장면(사진=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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