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용익의 록코노믹스]탐욕이 불러온 반 헤일런의 침몰

  • 등록 2020-10-10 오후 1:47:05

    수정 2020-10-10 오후 5:22:58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이제 모두 옛날 얘기가 됐다. 미국 하드록/헤비메탈 밴드 반 헤일런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였던 에디 반 헤일런이 2020년 10월 6일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 말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해 록 음악계에 충격을 안겨줬던 에디 반 헤일런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그가 이끌었던 밴드 반 헤일런은 12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통해 전 세계에서 8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이 중 ‘1984’를 비롯한 5개 앨범은 미국에서만 1000만장 이상씩 팔렸다. 1983년에 발표한 “Jump”가 빌보드 싱글 차트(Hot 100) 1위에 올랐고,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1위에 오른 곡은 총 13개에 달한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에디 반 헤일런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위기는 탐욕에서 비롯됐다. 마이클 잭슨의 “Beat It” 기타 솔로를 ‘공짜로’ 녹음해줬던 그가 돈을 밝혔으리라고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에디 반 헤일런의 매니저로 활동했던 노엘 몽크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밴드의 성공이 멤버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여느 밴드와 마찬가지로 반 헤일런도 단지 음악이 좋아 모인 젊은이들이었다. 에디 반 헤일런(기타), 알렉스 반 헤일런(드럼), 데이비드 리 로스(보컬), 마이클 앤서니(베이스)는 197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명 클럽인 위스키 어 고 고 등에서 연주를 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반 헤일런은 출발부터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이들은 메이저 음반 회사 워너 브러더스 레코드의 모 오스틴 회장에게 직접 발탁돼 1978년 첫 앨범 ‘Van Halen’을 발표했다. 록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앨범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밴 헤일런의 데뷔 앨범은 발매 직후 빌보드 앨범 차트 19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뒀다.

문제는 ‘노예 계약’이었다. 반 헤일런의 데뷔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플래티넘(100만장 판매)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도, 멤버들은 돈을 손에 쥐지 못했다. 오히려 활동을 할수록 회사에 갚아야 하는 빚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심지어 워너 브러더스는 반 헤일런이 2년마다 ‘똑같은’ 조건으로 ‘평생’ 계약을 갱신하도록 하고 있었다.

결국 반 헤일런은 로드 매니저였던 노엘 몽크를 새 매니저로 고용해 잘못을 바로잡기로 했다. 몽크의 첫 번째 임무는 반 헤일런이 과거 무명 시절에 워너 브러더스와 체결했던 노예 계약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몽크는 “레코드 회사에 로열티와 회계 장부를 요구하는 서류를 끊임없이 제출해서 그들은 나를 지긋지긋하게 여겼다”고 회고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 몽크가 보내는 서류들에 질려버렸던 탓인지 워너 브러더스가 반 헤일런과의 재계약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몽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워너 브러더스의 모 오스틴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반 헤일런이 이제 ‘자유의 몸’이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진행된 재계약 협상을 통해 몽크는 반 헤일런 멤버들이 곧바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몽크의 수완은 뛰어났다. 1983년 5월 29일부터 6월 4일까지 열린 ‘US 페스티벌’ 당시에는 주최측과 협상해 반 헤일런보다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밴드가 없도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 반 헤일런은 이 페스티벌에서 단 1회 공연으로 150만달러를 받았다.

몽크에 따르면 반 헤일런의 위기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손에 돈이 들어오고 여자와 술과 마약을 마음껏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싹텄다. 서로 더 많은 돈을 가져가겠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무명 시절 밴드의 수입을 4명이 똑같이 나누기로 했던 약속은 깨져버렸다.

갈등의 두 축은 보컬리스트인 데이비드 리 로스와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에디 반 헤일런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밴드의 작곡가였고, 가장 인기가 높은 멤버들이었다. 두 사람이 없는 반 헤일런은 있을 수 없었다. 알렉스 반 헤일런은 동생 에디의 보호를 받았다. 갈등과 불화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은 베이시스트였던 마이클 앤서니였다. 멤버들은 앤서니를 불러 음반의 로열티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는 반 헤일런의 상업적 성공이 정점에 이르렀던 앨범 ‘1984’를 발표한 직후였다.

반 헤일런의 탐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밴드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준 매니저 노엘 몽크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밴드 수입의 20%를 가져가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반 헤일런은 7년 동안 몽크와 일하면서 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했던 것도 모자라, 해고할 때는 7년간의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며 매니저의 횡령이 있었는지를 조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해고당한 옛 매니저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밴드 멤버의 로열티를 빼앗고 매니저를 해고한 것으로도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데이비드 리 로스는 ‘1984 투어’ 직후 반 헤일런을 탈퇴했다. 밴드의 사운드, 이미지, 스케쥴 등과 관련해 에디 반 헤일런과의 주도권 싸움 끝에 탈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솔로 활동을 하면 수입을 나누지 않고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이러한 이유로 밴드를 탈퇴한다.

반 헤일런은 새미 헤이거, 게리 셰론을 새로운 보컬리스트로 차례로 영입해 계속 활동했다. 하지만 “Eruption”의 혁신도 “Jump”의 인기도 재현되지 못했다. 로스를 다시 받아들여 2012년 내놓은 12집 ‘A Different Kind of Truth’는 웬만한 팬이 아니라면 발표됐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돌이켜 보면 반 헤일런은 커리어의 정점에서 서서히 침몰했고, 침몰의 원인이 된 갈등의 중심에는 돈이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에디 반 헤일런은 평생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유명인들의 자산 가치를 평가하는 셀레브리티 넷 워스에 따르면 에디의 사망 직전 자산 가치는 1억 달러로 추산됐다. 그의 유명세에 비하면 적은 돈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록 기타리스트로서 이만한 부를 쌓은 사람도 드물다는 반론도 있다.

다만 에디 반 헤일런 스스로는 자신의 생애가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네덜란드 태생인 그는 지난 2015년 스미스소니언 미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우리 가족은 약 50달러와 한 대의 피아노를 갖고 이곳에 왔다. 그리고 우리는 영어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보라.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라고 말했다.

위대한 기타리스트 에디 반 헤일런의 명복을 빈다.

반 헤일런의 옛 매니저 노엘 몽크가 쓴 회고록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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