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병자호란 이후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형제에서 군신으로 뒤바뀐다. 조선은 청의 사신이 오면 2품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를 의주에 보내 마중하는 것으로 예를 갖췄다. 한양에 온 청의 사신은 모화관(慕華館)에 머물렀다.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 황제의 사신을 영접하려고 서대문 밖에 건립한 시설이었다. 모화관이 있던 이 동네는 일제가 시대 관동(館洞)으로 불렀다.
| 서울시 서대문구 영천동에 있는 영천시장.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신효한 약수 ‘영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사진=서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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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에 일제식 지명을 버리고 새 이름을 찾는 과정에서 서대문구 영천동이 됐다. 지명은 동네에 있던 약수터 ‘악박골’에서 유래했다. 여기 약수는 건강에 좋고 병을 낫게 할 만큼 신효했는데, 물을 마시고 위장병을 고쳤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약수를 마시러온 이들이 영천동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악박골을 품은 안산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였으니, 열극수(암석을 거쳐서 솟아나는 물)가 건강에 좋다는 믿음을 더해서, 이 약수터는 ‘신기한 약효가 있는 샘’이라는 의미에서 영천(靈泉)으로 불렸다.
산에서 흘러나온 약수가 영천에서만 솟은 게 아니었으니, 영천동 인근은 물이 맑고 넉넉하기로 유명했다. 지금의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북쪽에는 무악산 지맥에서 터져 나와 샘솟은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에 터 잡아 사는 동네 사람들은 물이 마르지 않고 차가우니 냉천(冷泉·차가운 샘)이라고 불렀다. 우물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서대문구 냉천동이다.
영천동과 냉천동 사이에 있는 옥천동의 지명도 비슷하게 유래했다. 과거에 안산에서 발원해 마포를 거쳐, 한강까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이 개울은 옥천동을 지나쳐갔는데, 거기 이르러서는 한데 뭉쳐 폭포처럼 떨어지면서 흘러갔다. 이 모습이 옥처럼 맑아 보인다고 해서 ‘옥폭’이라고 불렀고 동네를 옥폭동이라고 이름붙였다.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행정구역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옥천동이 됐다.
악박골은 개발과정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독립문 서쪽으로 안산 바로 밑에 있었으니, 아마도 지금의 독립문극동아파트 터에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빛 폭포처럼 흘러 한강에 닿았던 옥천동의 물길도, 차디찬 냉수를 뿜어내던 냉천동의 우물도 지금은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