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당혹스럽네요. 근데 여기서 다 같이 닭싸움 하면 재미있겠다.”(이규형)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배우의 목소리에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 사람의 기척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암흑 속이다. 관객들의 큰 기대 속에 펼쳐진 ‘어둠 속 배우와의 만남’ <사의 찬미>편은 그렇게 어둠이 열어주는 새로운 몸의 감각과 약간의 당혹감, 그리고 웃음을 동시에 안겨주며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됐다. 지난 27일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이뤄진 이날의 만남 현장을 들여다보자.
<사의 찬미>는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동반 투신사건을 바탕으로 한 창작뮤지컬이다. 극중 신원미상의 ‘사내’가 자아내는 음험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뮤지컬이니만큼, 여름을 맞아 진행된 납량특집 ‘어둠 속 배우와의 만남’에 꼭 맞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날 공연장에 도착한 스무 명의 참가자들은 하우스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블루스퀘어 투어를 마친 후 삼성카드홀 객석 1층 로비에 마련된 행사장에 자리해 배우들을 기다렸다.
곧이어 등장한 배우들은 “안녕하세요.”라고 어둠 속에서 인사말을 건넸다. 배우들은 목소리를 변조해 정체를 숨겼지만, 이미 배우들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는 관객들의 예민한 귀를 속이기란 쉽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서의 만남에 쑥스러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듯, 배우와 참가자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차차 어둠에 적응해갔다. 이날의 첫 순서는 관객들이 작품에 대해 궁금한 점을 배우들에게 묻는 Q&A시간. 잠시 주저하던 관객들은 “안보이니까 편하게 질문하기 좋을 것 같아요.”라는 신의정의 말에 금세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관객과의 Q&A>
Q 1차 공연이 끝나고 2차 공연이 시작되면서 몇몇 디테일이 조금씩 바뀐 것 같은데 어떤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신의정: 연출님이 특별히 얘기하신 게 아니라 대부분 저희끼리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들이에요. 순간순간 즉흥적으로 나오는 부분 같아요.
이충주: 정해진 법칙에 따라 바뀐 것은 없어요. 그냥 배우들끼리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겁니다. 오늘 책상에 앉고 싶으면 책상에 앉고, 의자에 앉고 싶으면 의자에 앉고요.
Q 사내가 우진을 들어서 내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누가 사내를 연기하느냐에 따라 아픈 정도가 다른가요?
이충주: 다 힘들어요(일동웃음). 많이들 걱정해주시는데,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고 있어요. 힘들지만 연기는 연기일 뿐이니까요. 대신에 제가 이겨내려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잘 버텨내고 있습니다.
공연장 투어 후 객석 1층으로 내려가는 관객들
Q 사내가 우진의 공포를 인격화한 존재 혹은 환상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충주: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하는 부분이 있어요. 우진이 만들어낸 환상, 나를 괴롭히는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라고 생각하고 다가가는 측면이 있죠. 하지만 극중에서는 사내가 우진의 눈 앞에 분명히 실재하는 사람이어야 우진이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고, 또 마지막에 사내를 이겨내려고 하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도 신경을 쓰고 있어요.
Q 극중 우진이 자신에게 우편으로 도착한 원고를 발표했다고 노래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원고는 사내가 직접 우진의 이름으로 세상에 발표한 건가요, 아니면 우진 스스로 자기 이름을 넣어 발표한 건가요.
이충주: 두 번째 경우에 가깝죠. 실제 당시의 김우진에 대해 공부해보면, 우진이 유학을 마치고 가업을 물려받아 일하면서 굉장히 날카로운 글들을 많이 발표했거든요. 그걸 우리 극에서는 사내가 우진에게 보낸 글을 우진이 자신이 쓴 것처럼 해서 발표했다는 설정으로 가고 있죠.
Q 심덕의 이번 의상 마음에 드시나요?(일동웃음) 짧아서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신의정: 원래 더 길었는데 조금 잘랐어요. 좀 더 늘리는 게 나을까요? 제 체형에 좀 맞지 않는 옷이긴 한데 그렇게 불편하진 않아요. 다만 어깨를 강조시켰다는 게 좀(일동웃음). 좀 늘리는 걸 건의해보겠습니다(웃음).
이규형: 패션 아이템?(일동웃음) 모자가 딱히 어떤 의미를 가진 건 아니에요. 근데 몸에서 나오는 열의 70%가 머리에서 방출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더워 죽겠어요(일동웃음). 일단 사내가 모자를 쓰고 다녔다는 건 당시 시대에 대한 기본적인 고증이죠. 그리고 연출님이 초연 때부터 ‘내가 원하는 사내는 이런 존재야’하면서 보여준 사진이 있어요. 어떤 남자가 중절모를 푹 눌러쓰고 담배를 물고 수트를 입고 있는 그림인데, 거기서 풍겨져 나오는 미스터리하고 멋있는 분위기 때문에 중절모를 사내의 마스코트처럼 활용하게 된 것 같아요. 근데 리허설 때 표정이 잘 안 보인다는 의견이 많아서 요새는 등장하자마자 모자를 벗고 표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드라마적인 디테일을 좀 더 전달하려고 하고 있어요.
어둠 속 Q&A
Q 연출님이 각 캐릭터마다 연기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을 텐데, 각각 어떤 조언을 들으셨나요.
이규형: 연출님이 배우의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디렉션을 주세요. 예를 들어 배우가 되게 강해 보이는 사람이면 좀 더 약하게 가보자고 하시고, 배우가 좀 유약해 보이는 사람이면 더 의지를 갖고 강하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세요. 같은 인물을 연기하더라도 배우가 다르면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나 뉘앙스가 다르거든요.
사내들한테도 전체적인 큰 틀 외에는 다 다른 디렉션을 주셨어요. 정민 형의 경우에는 등장만 해도 ‘수트빨’ 때문인지 그 그림 속의 남자 같은 분위기가 나요. 뱀처럼 스르르 움직이고, 말을 할 때도 거의 화를 안 내고 툭툭 던지는데 ‘저 새끼 뭐지?’싶은(일동웃음)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있거든요. 저한테는 ‘넌 그런 간지가 안 나니까’하면서 연출님이 <다크나이트>의 히스 레저처럼 참조가 될 만한 캐릭터를 알려주셨어요. 저도 <레옹>의 게리 올드만 같은 악역을 참고하기도 했고요. 그런 차이점이 있죠.
신의정: 연출님이 원래 배우였잖아요. 그때부터 굉장히 친했기 때문에 연출님이 저를 잘 아세요. 그래서 과거의 심덕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너가 스물 다섯 살이었을 때처럼 더 밝게, 망나니처럼 해봐’라고 하셨고, 시간이 지난 후의 장면에서는 좀 더 세게 해보라고 하셨어요. 처음엔 배우에게 주는 디렉션이 다 비슷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배우의 성향마다 다 다른 디렉션을 주시더라고요.
이충주: 저는 연출님이 처음부터 ‘이충주, 하면 사내가 떠오르는데 김우진을 해보자. 이런 캐릭터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라고 하셔서 마음이 통했어요. 그래서 재미있게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우진이는 이 뮤지컬의 드라마를 끌어가는 주인공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규형, 신의정: 나한테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일동웃음)
이충주: (웃음)우진이 나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우진은 심덕을 살리는 히어로이기 때문에 너무 나약하거나 찌질하지 않은, 내면에 강인함이 있는 우진을 만들라고 많은 디렉션을 주셨어요. 저도 그렇게 표현하려고 노력했고요.
객석 여기저기에 출몰한 사내(이규형)
Q 이규형 씨는 초연부터 출연해왔는데, 이번 세 번째 공연에서 변화를 준 부분이 있나요?
이규형: 제가 이번 프로덕션에서 힘들었던 건 1차와 2차, 3차 때 연출님의 생각이 미묘하게 다 달라서예요. 그러다 보니 그 세 가지가 제 안에서 충돌하는 거죠. 예를 들면 예전엔 우진과 심덕을 장난감처럼 생각하기도 했고, 또 다른 때는 심덕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심덕을 연기하는 배우마다 색깔이 달라서 그게 모든 사람마다 공통적으로 적용돼진 않더라고요. 이번엔 기존에 했던 것들을 좀 내려놓고 다른 배우들에게서 받는 호흡에 따라 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좀 더 분석적인 측면을 이야기하자면, 사내가 심덕에게 ‘넌 이폴리타야’라고 말할 때의 그 이폴리타 또한 사내가 죽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폴리타는 다눈치오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인데, 사내가 조선과 일본뿐 아니라 글로벌하게(일동웃음)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눈치오가 쓴 작품까지도 사내가 쓴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봤고요.
오랫동안 기다려온 만남인데 얼굴도 못 보고 헤어질 수는 없다. 게임이 끝난 후 환하게 불이 켜진 장내에서 비로소 이날의 참가자와 배우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배우들은 참가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하며 추억을 남겼고, ‘어둠 속 만남’이라는 흔치 않은 행사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비슷한 컨셉의 전시회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걸 알아서 저도 한번 참여해보고 싶었어요. 어둠 속이라 그런지 훨씬 편안했고, 여러분을 좀 더 가깝게 느꼈던 것 같아요.”(신의정)
“월요일에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엔 당혹스러웠는데 하면 할수록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다음에는 음성변조도 철저히 해서 빛 한 줄기 안 들어오는 암흑 속에서 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이규형)
“처음이라 되게 재미있었고, 또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라고 말한 이충주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의 찬미>는 까면 깔수록 매력이 나오는 양파 같은 작품이에요. 공연 끝날 때까지 함께 해주시면 네 번째, 다섯 번째 공연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라며 공연장에서의 또 다른 만남을 기대했다.
<사의 찬미>는 9월 6일까지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펼쳐진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