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윤수은 기자]
TV 프로그램은 대중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다. 그러나 보다 진지한 시선에서 대중매체를 다루는 태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기존 매체에선 단순히 방송 내용들을 요약하거나, 시청자(관객)의 반응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TV 만화경’은 대중매체의 표면적인 현상을 설명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드라마의 이야기나 예능 프로그램의 통속성 뒤에 숨어있는 ‘인문학적 메시지’를 끌어낸다. 가장 평범한 것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고자 한다.
‘육아예능’ 전성시대다. 원조 육아예능인 MBC ‘아빠, 어디가’부터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이르기까지 주말 안방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는 것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육아 프로그램의 인기 요인은 단지 아이들의 재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겠지만 육아예능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아이들의 ‘아빠’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육아와 가사에 애쓰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연예인 아빠들의 모습은 ‘슈퍼대디’(super daddy) ‘프렌디’(friend+daddy)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 육아예능의 대표격인 KBS2TV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추성훈 추사랑 부녀. 육아프로그램의 인기 이유는 단지 아이들의 재롱만 아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가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사진=이데일리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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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참신함은 연예인 아빠들의 일상생활을 통해 더 이상 육아와 가사가 여성만의 책임이 아니며, 남성 또한 부담을 나눠가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기존에 있어온 한국사회 가부장의 전형적 이미지를 탈피한 데에 있다. 결혼한 여성을 ‘아내’ 혹은 ‘안 사람’이라 부를 만큼 한국 사회에선 전통적으로 여성의 활동을 집안일, 가사노동으로 인식해왔으며 근대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의 이미지는 바깥일을 하는 직장 남성과 집안일을 하는 전업주부로 부부의 성역할을 양분해왔다. 다시 말해 지금 인기를 끄는 육아 프로그램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가정내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일대 패러다임에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일단 여성시청자의 관점에서 보면. 육아예능은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이 처한 현실적 문제에 일말의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미 한국사회는 여성들의 취업이 일상화 되었으며 여성은 더 이상 ‘안 사람’이 아니라 ‘바깥사람’의 일까지 도맡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워킹맘(Working Mom)’ 내지 ‘슈퍼맘(Super Mom)’이라는 어휘는 이런 현대 한국 직장여성의 처지를 반영한 말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오랜 고정관념도 뿌리 깊게 박혀있다. 우리 시대의 직업여성들은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직업활동도 해야 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이었던 육아와 가사 역시 해결해야하는 이중의 딜레마에 처해있는 것이다.
| CJ그룹의 경력단절여성 채용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성들. ‘경력단절여성’이란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사회의 여성들은‘가정 아니면 직장’이라는 선택의 갈래길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육아예능 속 슈퍼대디의 모습은 이런 현실을 달래는 판타지인 셈이다. 사진=이데일리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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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주부로 살다가 재취업의 어려움을 겪는 ‘경력단절여성’의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듯, 한국의 직장 여성들은 ‘가정 아니면 직장’이라는 선택의 갈래길 사이에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결국은 가정과 직장 모두를 혼자서 부담하거나 아예 한 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몰리고 있다. 그런 상황이니 여성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공감하고 육아와 가사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육아예능 속 슈퍼대디의 모습에 환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결국 여성에게만 전적으로 육아와 가사의 문제를 떠넘길 수 없으며, 자연스럽게 남성 또한 기존의 관습적, 문화적 틀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여성의 부담을 나눠 짊어질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육아예능 전성시대’는 작금의 시대상과 시대적 필요에 대한 문화적 반영인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프랑스의 여류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가 자신의 저술 「제 2의 성」에서 주창한 바 있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란 명제는 우리에게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에 입각해서 보부아르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선천적으로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역사, 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해서 만들어진 후천적인 것이며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역할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명제를 살짝 뒤집어보자. ‘남성 역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아빠는 엄마의 역할을, 엄마는 아빠의 역할을 서로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맞벌이와 야근이 상식으로 자리잡은 이 고단하고 팍팍한 현실 속에서 가정을 만들거나 유지할 수가 없다. 여성이 전통적 남성의 생계 책임을 일부 떠맡게 된 지금, 남성 또한 여성의 육아, 가사 부담을 짊어져가야 한다. 더 이상 고정된 성역할은 없다. 그에 관한 편견과 선입견만이 있을 뿐이다. 육아예능 프로그램은 아직도 기존의 가정, 기존의 성역할 인식에 고착화된 우리의 굳은 인식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TV 모니터 속 슈퍼대디와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에 가려진 ‘평범한 가정’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바람직한 형태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모색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