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청나라는 1636년 병자년 12월(음력) 조선을 침략했다. 형제 관계이던 조선에 군신 관계를 강요하고 거부하자 일으킨 전쟁이었다. 병자호란은 이듬해 1월 인조대왕이 항복하고 막을 내렸다.
|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사진=영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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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 짧은 전쟁이었지만 조선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굴욕을 겪었다. 이후로 두 나라는 왕(청)과 신하(조선)가 됐고, 조선의 군대가 청을 대신해 명과 싸워야 했으며, 청태종의 업적을 기리는 삼전도청태종공덕비를 세워야 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9년간 볼모로 잡혀갔다.
애초 인조는 강화로 피난을 떠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청군이 지금의 은평구까지 쳐들어온 탓에 서쪽으로 가다가는 마주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갔다. 도성에서 떠난 피난길은 남한산성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서울 송파구는 피난길의 경로였다. 송파구 지명을 훑어보면 병자호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인조 일행이 피란길에 쉬어간 마을은 문씨 집성촌이었다. 거기서 인조는 갈증을 느끼고 물을 마셨는데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문(文)씨 마을의 우물(井·정) 물을 기억하려고 이후로 이 마을을 문정이라고 불렀다. 이게 지금의 문정동으로 이어진다.
피난길을 떠난 인조는 고개를 넘어가는 길에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인조는 신하에게 무릎 뒤 오금이 저리다고 했는데 이후로 고개를 오금골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게 오금동 명의 유래다. 마을에 오동나무(梧)가 많고 가야금(琴) 만드는 이가 살고 있어서 오금이 됐다는 설도 있다.
왕의 피난길이 안전하도록 백성이 나서서 청군과 싸운 일이 마을 이름이 된 곳도 있다. 청군은 남한산성 길목에 있는 한 마을을 거쳐 진군하다가 마을 사람들의 거친 공격을 받았고 결국 진로를 바꿔야 했다. 오랑캐(夷·오랑캐 이)를 막아낸(防·막을 방) 이 마을은 나중에 방이골로 불렸다. 이후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한자를 꽃다울 방(芳)과 흰비름 이(荑)로 고쳤다. 현재의 방이동이다.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한 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닿는 예법,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명을 따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라고 기록한다. 삼전도는 마을에 밭이 세 개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지명은 계속돼 송파구 삼전동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