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간직해달라"...국보 '세한도' 아무 조건없이 기증한 손창근

"과묵한 성격에 미술품 고민 많이해"
부친 손세기 이어 문화재 수집
평소엔 근검절약...문화재 구입은 아낌없이
  • 등록 2020-12-10 오전 6:00:00

    수정 2020-12-10 오전 6:00:00

세한도 기증 손창근(92)씨와 기념촬영 하는 문 대통령(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귀중한 유물을 저 대신 잘 간직해주세요.”

올해 2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최고 걸작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손창근(92)씨가 유일하게 남긴 말이다. 이외에 기증에 따른 어떤 조건도, 예우도 요구하지 않았다. 문화재계 관계자들은 “문화재를 금전적 가치로 먼저 환산하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본연의 가치만 생각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문화재청은 이에 지난 8일 손 씨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문화훈장 중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 수여는 2004년 문화유산 정부포상 이래 처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9일 오후 손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세한도’는 ‘무가지보’, 즉 가격을 배길 수 없는 보물이라는 표현을 신문에서 봤는데 아주 공감된다”며 “대를 이어서 아주 소중한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수집·보호하고 기증해 주셔서 국가가 얼마나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날 환담회에는 손씨를 비롯해, 차남인 손성규 연세대 교수 내외, 박양우 문체부 장관,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세한도’와 대를 이은 문화유산 보존과 기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눴다.

손씨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부친 손세기(1903~1983) 선생의 영향이 컸다. 개성에서 이름난 인삼 무역상이었던 손세기 선생은 평소 근검절약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문화재를 구입하는 데는 아낌이 없었다. 그는 15세기 최초의 한글 서적 ‘용비어천가’ 초간본과 한국 대표적 서화가인 정선·심사정·김득신·김정희의 작품 등 국보급 유물 다수를 사 모았다. 손창근씨는 이런 선친을 따라다니며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이후 1960년대 외국인 상사에 근무하던 시절 본격적으로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손성규 교수는 “두 분은 항상 집에서 문화재에 대한 얘기를 나누시곤 했다”고 기억을 되새겼다.

수많은 유물과 작가 중에서도 부자는 김정희의 작품을 특별히 여겼다. 때문에 손세기 선생은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저당 잡혀 있던 김정희의 ‘세한도’와 ‘불이선란도’를 큰돈을 주고 매입했다. 손창근씨는 김정희 예서의 대표작 ‘잔서완석루’를 구입 할 당시 현금이 부족하자 증권을 팔아 구입하기도 했다. 특히 ‘세한도’는 손씨가 “자식보다 귀하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큰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다. 아들인 손성규 교수도 세한도를 집에서는 딱 1번 봤을 정도였다. 지난 2018년 대를 걸쳐 수집해 온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304점을 박물관에 기증하면서도 ‘세한도’ 만큼은 끝까지 놓아주지 못했었다.

이후 1년 넘게 고민을 한 끝에 손씨가 세한도까지 기증하면서 유물은 180여년 만에 국민 품으로 가게 됐다.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 시절 그린 그림은 지난 세월 동안 주인만 열 번 넘게 바뀌었다. 그 중 손씨 가문과는 50년 가까이 함께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세한도’는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굉장히 좋다”며 “서화류는 온도, 습도의 영향을 받아 관리하기가 까다로운 데 두 부자가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을지 알 수 있다”고 감탄했다.

한편 두 부자는 문화재 수집뿐 아니라 기부에도 앞장섰다. 손세기 선생은 생전 ‘양사언필’ 초서 등 고서화 200점을 서강대에 기증했다. 손창근 씨는 이를 본받아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연구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고, 2012년에는 50여 년간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경기도 용인의 1000억원대 산림 약 200만평을 국가에 기부하기도 했다.
지난 2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180호)를 아무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한 공로를 인정 받아 금관문화훈장 수훈자로 선정된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씨(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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