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판사, 판결, 그리고 소통

  • 등록 2017-06-28 오전 6:46:29

    수정 2017-06-28 오전 6:46:45

유영근 판사


[유영근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권력을 가진 자가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차라리 화를 내면 낫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 없고 표정까지 애매하면 상대방은 정말 애간장이 탄다. 세상의 많은 슈퍼 갑들이 이런 방식을 애용한다. 을(乙 )은 스스로 알아서 잘 되어가고 있는지 혹시 부족한 점이 없는지 찾아야 한다. 갑(甲)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온갖 라인을 가동한다. 갑은 참 편리한 방식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권력은 남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주어진 힘을 말한다. 그렇다면 법정에서는 판사가 권력을 가진 자가 맞다. 퇴직한 법관들은 이구동성으로 판사가 그렇게 높은 줄 현직에 있을 땐 몰랐다고 말한다. 판사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 원로 선배님께 조언을 들었다.

“모든 답은 기록을 샅샅이 뒤지면 나온다. 법정에서 말은 적게 할수록 좋다. 행동은 한없이 무겁게, 표정은 포커페이스가 좋다.”

진심어린 충고였고, 나도 그에 따르려고 무진 애를 썼다.

20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후배들에게 그런 충고를 하지 못한다. 기록을 아무리 뒤져도 답이 안 나오는 경우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법정에서 차근차근 물어보면 의외로 사건의 본질이 딴 데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복잡하게 얽힌 일련의 사실 중에서 법률적으로 의미 있는 부분을 간추려 재구성하는 것은 재판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 재구성 과정에서 온갖 착각과 오해와 의도적인 왜곡이 생기기 때문에 기록 안의 세상은 실제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카리스마 강하기로 유명한 부장님의 배석판사를 대직해 법정에 들어간 적이 있다. 부장님은 낮은 톤의 근엄한 목소리로 재판을 진행하셨고, 법정은 엄숙했다. 사건 당사자들은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지 않았고, 변호사들도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재판장이 화를 내거나 말을 자르지 않고 단지 포커페이스만 유지할 뿐인데도 증인마저 절도 있게 꼭 필요한 말만 했다. 정말 멋진 재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0여 년 흐른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주장이 간결하고 긴장감이 있으니 판사들은 좋았겠지만, 당사자와 소송대리인, 증인들도 과연 그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을까?

조선시대의 재판은 아주 편리했다. 이미 끌려와 오금이 저려 있는 사람은 “네 죄를 네가 알렷다!”는 한마디에 자신의 잘못을 술술 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작은 폭행 사건 하나에서도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상경하여…”부터 사연을 펼치곤 한다. 사건과 관련되지 않은 사연은 접어두었으면 좋겠지만, 나름대로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마저 법정에서 정작 필요한 말을 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의 결과만 정리된 사실관계로는 진짜 억울함을 가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건은 기록에서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요즘에는 포커페이스와 카리스마를 고집하지 않는 판사들이 늘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증거에 의하면, 저는 …한 이유로 원고의 말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피고는 …증거를 면밀히 검토해보시고, …에 유의해서 다음 기일까지 반박하고 증거를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판사가 자신의 심증을 공개해가면서 재판을 하는 방식이다. 당사자에게 말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중요한 쟁점이 무엇인지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판사는 주장과 증거를 미리 꼼꼼히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재판이 판사가 의중을 알아볼 수 없는 재판을 하다가 어느 순간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보다 훨씬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고, 당사자가 이기든 지든 수긍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결과에 승복하고 이유를 수긍하는 재판을 할 수는 없고, 그것이 꼭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판사라고 해도 당신처럼 판단했을 것이라는 꿈같은 말을 진짜로 꿈꾼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모든 사람들이 이런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포커페이스와 카리스마는 모두 한국말이 아니다. <우리는 왜 억울한가> 작가

▶ 유영근 판사는...

1969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제37회 사법시험(1995). 대전지방법원 판사(2001~2003).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2013~2015) / 현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2017.2~현재)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으아악! 안돼! 내 신발..."
  • 이즈나, 혼신의 무대
  • 만화 찢고 나온 미모
  • 지드래곤 스카프 ‘파워’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