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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聯政)’은 연립정부(聯立政府) 또는 연합정부(聯合政府)의 줄임말입니다. 유럽의 내각제 국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총선에서 제1당이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여소야대입니다. 연정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반면 대통령제와 연정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의회의 동의 절차가 있지만 대통령은 총리와 장관 지명을 통해 내각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굳이 다른 정치세력과 힘을 합쳐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 정치사에서 연정은 흔하지 않습니다.
박물관 수장고 속에서 잠자던 ‘대연정’이라는 단어를 세상 밖으로 꺼낸 인물은 노무현입니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이 제안한 대연정은 수많은 논란만 남긴 채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대연정이 불거졌습니다. 문재인 대세론을 맹추격하고 있는 ‘파죽지세’ 안희정이 꺼내들었습니다. 노무현의 대연정과 안희정의 대연정은 뭐가 다를까요? 대연정은 대립적 정치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신의 한수일까요? 이상에 불과한 허황된 담론일까요?
◇정당 결합방식에 따라 대연정·소연정…‘과반 안되면 연정’ 독일 일상 다반사
연정은 쉽게 표현하면 ‘적과의 동침’입니다. 이념적 지향이나 정책, 비전이 다른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집권을 위해 힘을 합치는 것입니다. 연정에 참여하는 정당의 이념적 거리 또는 결합 방식에 따라 소연정 또는 대연정으로 불립니다. 이념과 정책적 차이가 비교적 적을 경우 소연정,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을 경우 대연정으로 분류합니다. 의석분포로 보면 원내 제1당이 과반 확보를 위해 소수당과 손을 잡으면 소연정, 원내 1당과 2당이 연합해서 과반을 훌쩍 상회하는 압도적 다수를 구성하면 대연정입니다.
현행 여야 5당 구조를 예로 들겠습니다. 만일 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이 합치면 소연정으로, 민주당+자유한국당이 연합하면 대연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민주노동당과 결합했다면 소연정, 한나라당과 결합했다면 대연정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성공 사례가 사실 없습니다. DJP연대라는 이름으로 불린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공동정부가 대표적입니다. 물론 이 역시 국민의정부 도중에 깨졌습니다.
유럽에서는 연정이 흔합니다. 양당제(보수당 vs 노동당) 전통이 강한 영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다당제 정치지형이기 때문입니다. 총선에서 다수당이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했을 경우 다른 정당과의 연대로 과반을 확보한 뒤 연립정부를 구성합니다. 독일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과거 노무현이 언급했던 대연정 역시 독일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입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늘 연정을 구성해왔습니다. 특정 정당이 단독으로 집권한 사례가 없습니다. 1982년부터 1998년까지 지속된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자민당의 보수연정, 1998년 이후 사민당과 녹색당의 적록연정(赤綠聯政), 2005년에는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유명한 사례입니다.
◇노무현의 파격실험, 선거제도 개편 위해 대연정 제안
대연정의 저작권자는 노무현입니다. 2005년 참여정부 중반기 ‘대연정’은 대한민국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었습니다. 노무현의 돌발 제안에 여야 정치권은 물론 국민 모두가 놀랐습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라는 노무현의 구상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물론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달을 보지 않고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본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 현실에서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제안이라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었습니다.
노무현에게 대연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바로 선거제도 개편이었습니다. 헌행 헌법의 산물인 이른바 국회의원 소선구제로는 지역구도 극복이 쉽지 않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노무현은 3당합당으로 헝클어진 정치질서의 복원을 위해 선거제도 개편이 필수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오죽하면 2007년 임기말 개헌을 내걸 때도 선거구제 개편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여야 모두 비판이 봇물처럼 쏟아지자 노무현을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2005년 7월 29일 춘추관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대연정만 생각하는데, 원하는 것은 선거제도 개혁이다.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선거제도는 꼭 고치고 싶다”면서 “대연정 제안은 소위 말하는 반대급부의 내용이고, 진정으로 제안한 것은 선거제도를 고치자는 것,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걸 중심에 놓고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
◇반기문 불출마 최대 수혜주 안희정의 대연정 승부수
반기문의 불출마 이후 대선판 최대 수혜주는 안희정입니다. 문재인의 페이스메이커 정도로만 여겨졌던 미완의 기대주였지만 안희정의 상승세는 그야말로 눈부십니다. 확장성 부족이라는 친노의 꼬리표를 떼고 보수와 중도층에서 일정 지지세를 확보하며 어느새 문재인 대세론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안희정은 대연정 카드를 던졌습니다. 이상한 것은 여야의 반응입니다. 야권 내부에서는 비판론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범여권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입니다. 이미 경기도정에서 연정을 실험 중인 남경필 경기지사는 안희정의 대연정 제안을 환영했습니다. 정진석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안희정의 명분은 노무현 정부의 대연정-미완의 역사를 완성하겠다는 것’입니다. 안희정 역시 대연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안희정은 대연정 제안이 국정농단 세력과의 야합이라는 비판에 “연정 제안의 기본 취지는 민주주의 정치-의회정치의 대화와 타협 구조를 정상화시켜서 시대의 개혁과제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박근혜·최순실을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다. 차기정부를 누가 이끌든 대한민국 헌법은 의회와의 협치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다”고 본인의 진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연정없이 총리 인준 불가? vs 대연정이 만병통치약?
안희정의 대연정 제안은 검토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흰 쥐든 검은 쥐든 고양이만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차기 대선 이후 대통령과 의회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여소야대 구조라는 것입니다. 2월 18일 기준 현행 국회 의석수는 민주당 121석, 자유한국당 94석, 국민의당 38석, 바른정당 32석, 정의당 6석, 무소속 8석입니다. 어느 정당 대선후보가 승리한다 한들 의회의 협력 없이는 원활한 국정운영을 기대하기 힘든 구조입니다. 설령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및 친야 무소속 성향의 의원들이 세력을 모은다 해도 한국당과 바른정당이 반대하면 국회선진화법 기준선인 180석에 미치지 못합니다. 새 대통령의 주요 국정과제는 의회 문턱을 넘기가 어렵습니다. 19대 국회 시절 의회 내에서 과반을 확보했던 새누리당 소속 대통령 박근혜가 집권 내내 의회의 반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던 게 차기 정부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보면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새 정부 국무총리와 장관 인준부터 쉽지 않습니다. 우선 대선 과정에서 겪을 극심한 감정의 앙금을 고려하면 대선 이후 허니문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만에 하나 고심 끝에 지명한 국무총리 후보자가 야권의 검증공세에 밀려 낙마하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앞서 박근혜정부의 경우에도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였던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이 낙마한 전례도 있습니다. 만일 국무총리 후보자 인준이 늦어지면 각 부처 장관 임명 등 내각구성 역시 순차적으로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 대통령과 야당과의 갈등이 확산될 경우 차기 대통령은 박근혜정부의 탄핵내각 다시 말해 황교안 총리 이하 각 부처 장관과 상당 기간 어색한 동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를 둘러싼 여야의 극단적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대연정만큼 효과적인 정치구조도 없습니다. 헌재의 탄핵 확정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신병 처리 문제, 87년 체제의 모순 극복을 위한 현행 헌법의 개정,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와 북한의 핵개발 방지 등 대북이슈 등 등 메가톤급 현안을 여야가 해결하는 것 역시 대연정 구조 틀 안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대연정 불가능한 정치현실…안희정의 프레임 전략
그러나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입니다. 우리나라 권력구조가 내각제라면 연정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제 특성을 고려하면 대연정은 논리적으로 가능할 뿐 한국적 정치현실에서 불가능합니다.
우선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자유한국당만을 제외한 연정이 가능할까요. 한국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연정에 합의하면 200석에 육박하지만 매우 불안정한 구조입니다. 아울러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대연정이 성사되면 야당이라는 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령 어떤 식으로든 대연정이 성사된다 한들 대연정 체제 안에서 주요 이슈를 둘러싼 다툼과 논란은 불가피합니다. 더구나 연정 협상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총선 이후 매번 연정을 구성하는 독일의 경우에도 연정 협상에는 수개월이 걸립니다. 연정에 참여하는 각 정당의 협상 파트너들이 주요 정책과 정잼을 놓고 이견을 줄여서 합의점을 낮는 과정입니다. 소연정이라면 상대적으로 기간도 줄고 협상도 수월하겠지만 대연정은 그동안 우리정치의 갈등구조를 고려할 때 우물가에 가서 숭늉을 찾는 격입니다.
더 큰 문제는 내년 6월 지방선거입니다. 대연정 체제가 성립되면 여야의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하기 때문에 내년 선거판이 이상해집니다. 야당의 경우 여당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해야 하는데 야당 스스로가 대연정 구조에 참여한 이상 여당의 책임을 묻기가 논리적으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아울러 참여정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지층을 설득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야권 지지층의 경우 정권교체가 이뤄질 경우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의 적폐청산과 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요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연정에 참여한 범여권 세력은 개혁의 주체이면서 곧 대상이 됩니다. 대연정 주도세력 역시 연정의 파트너를 반개혁세력으로 매도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대연정은 안희정의 프레임 전략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차기 대선의 최대 프레임은 정권교체입니다. 정치교체, 세대교체 등등 어떤 프레임도 정권교체 앞에서는 맥을 쓰지 못합니다. 정권교체 프레임은 2012년 야권 단일후보였던 문재인이 선점했습니다. 안희정은 대연정이라는 프레임으로 반전을 시도했습니다. 어느 정도 적중했습니다. 최근 안희정의 지지율 상승세입니다. 중도·보수층의 지지 때문입니다. 17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2월 3주차 조사에서 안희정은 마의 20%를 넘어섰습니다. 보수(안희정 23% vs 문재인 16%) 중도(안희정 26% vs 문재인 27%) 진보(안희정 19% vs 문재인53%). 보수와 중도 지지층에서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높습니다. 바른정당 지지층에서 유승민(24%)를 제치고 27%를 얻으며 1위로 올라섰습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대선 이후의 정치상황까지 심각하게 고민해서 투표하면 안희정의 대연정 구상은 먹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능성은 너무나도 희박해보입니다.
만일 그가 문재인 대세론에 밀려 제2의 노무현이 되지 못한다 해도 차차기를 위한 소중한 자산 하나는 남겨둘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차기 정부에서도 고비용 저효율로 상징되는 대립과 갈등의 정치구조가 지속될 경우 어떤 식으로든 개헌과 더불어 연정 논의는 보다 활발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 ‘대연정’은 오롯이 안희정의 정치적 자산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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