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가 망한 것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정책금리를 아주 빠른 속도로 올려 국채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SVB는 은행업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유동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문을 닫게 됐다. 총 자산의 절반 가량을 국채 등에 투자한 SVB는 주고객층인 스타트업들의 대규모 예금 인출에 대응한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안 좋다는 ‘소문’은 온라인·모바일 뱅킹의 빠른 예금 인출로 나타났다.
SVB 다음으로 문을 닫은 시그니처 은행에는 2008년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금융기관에 규제를 강화하는 ‘도드-프랭크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법까지 만들었던 바니 프랭크 전 하원의원이 이사로 있었다. 금융규제를 강화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 정작 시그니처 은행에선 로비를 통해 규제에서 빠지려고 노력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도드-프랭크법’은 2018년 완화됐고 SVB, 시그니처 등 중소·지역은행들은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등 유동성 규제를 안 받게 됐다.
‘유동성’을 무시한 은행처럼 교과서적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례는 또 있다. 스위스 규제당국(FINMA)이 크레디트스위스(CS)를 구제하는 과정에서 주식·채권 투자자를 역차별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UBS가 CS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CS의 모든 주주는 22.48주당 UBS 1주를 받게 됐다. 코코본드 투자자가 한순간에 자신의 돈을 모두 잃게 된 것과 상반된다.
유럽은행 감독청은 뒤늦게 “보통주는 손실을 흡수하는 첫 번째 상품이고 보통주로 손실을 충분히 흡수한 이후에야 AT1이 손실을 흡수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투자자들의 신뢰는 무너졌다. 누가 이런 은행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겠는가. 2017년에도 스페인 은행 방코 포풀라(Banco Popular)의 코코본드가 상각됐지만 당시엔 주식 투자금(자본)도 상각됐다.
단기 예금을 받아 장기로 투자하면서 유동성 관리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은행부터 경영 부실에 책임이 있는 주주를 보호하면서 코코본드를 100% 상각키로 한 스위스 당국까지, 최근 벌어진 안전자산의 배신은 기본과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