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만취한 채 건물서 추락사…法 "자살 아닌 사고"

보험사 상대 보험금청구소송서 유족 손 들어줘
"정황사실만으론 자살로 보기에 부족하고 증거 없어"
  • 등록 2017-10-06 오전 9:00:00

    수정 2017-10-06 오전 9:00:00

[이데일리 이승현 기자] 중년 남성이 새벽 시간에 만취한 채 건물에서 추락해 죽자 유족과 보험사가 자살 여부를 두고 다툰 사건에서 법원이 유족 측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보험사가 계약자의 자살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자 자살 사실에 대한 매우 엄격한 입증책임을 지웠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재판장 설민수)는 고(高) 이모씨의 부인 최씨와 자녀 2명이 M화재보험사를 상대로 낸 총 4억 4000만원의 보험금지급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고 6일 밝혔다. 최씨와 두 자녀는 아버지 이씨의 법정상속인 자격으로 그가 맺은 보험계약의 수익자가 됐다.

법원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해 6월 3일 오전 4시 40분쯤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의 6층 외부 비상계단에서 떨어져 숨을 거뒀다. 이씨는 전날 오후 9시쯤 1층 식당에서 주인과 시비가 붙어 다음날 오전 1시 50분까지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러다 다시 1층 식당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6층에 올라갔다 계단에 머무르던 중 추락한 것이다.

당시 계단의 철제난간에 동그란 모양으로 묶인 노끈에서 이씨의 유전자(DNA)가 검출됐다. 이씨의 아내와 자녀는 수사기관에 ‘이씨가 형과 상속재산 처분과정에서 갈등이 있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보험사는 이러한 정황을 바탕으로 이씨가 자살을 했고 이 경우 ‘피보험자의 고의로 자신을 해칭 경우’에 해당해 보험금 지급 의무가 면책된다고 주장했다.

보험사는 그러나 재판부가 합리적 의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재판부는 이씨가 우울증 등 정신질환 치료를 받거나 가족간 불화 및 경제적 곤궁상태에 있다고 보기 어렵고 유서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노끈에 DNA가 검출됐지만 이를 근거로 이씨가 철제난간에 노끈을 묶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도 했다. 실제 이씨의 목에선 노끈의 섬유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또 이씨가 사고 전날 자녀와 통화에서 ‘충남 태안으로 가족여행을 가자’고 말한 것은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는 “보험사에 유리한 정황사실로는 이씨가 자살했거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보험사고를 일으켰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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