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고급 주택단지로 변한 이곳[땅의 이름은]

시신이 드나들던 광희문 주변으로 무당 모이면서 신당 밀집
자연히 조성된 신당리 묘지, 서울 인구 팽창하면서 개발돼
시내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점 살려 대규모 주택 공급
  • 등록 2024-01-06 오후 12:30:00

    수정 2024-01-06 오후 12:30:00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조선 시대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성밖에 묻었다. 대부분 서쪽으로 난 서소문과 동쪽으로 트인 광희문으로 운구해 주변에서 장례를 치렀다. 서소문과 가까운 애오개 지명 유래 가운데 하나가 ‘어린아이 무덤’이 형성된 지역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천주교 순례터(참형장)가 서소문 가까이 있던 이유를 여기서 찾는 분석도 있다.

신당리 묘지. 묘지 넘어로 보이는 광희문과 그 뒤로 보이는 남산.(사진=서울역사박물관)
광희문이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는 의미의 시구문(屍口門) 달리 불린 것도 마찬가지다. 음산한 기운 탓에 일반인은 평소 이 문을 드나드는 걸 꺼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 인조는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지난 적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나면서였다. 당시 피난이 얼마나 시급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광희문을 나서자마자 나오는 신당동(新堂洞) 지명도 장례와 연관돼 있다. 신당 일대는 자연히 묘지가 조성됐고, 인근 금호동과 옥수동까지 묏자리가 이어져 일대는 거대한 공동묘지가 형성됐다. 망자 곁에는 혼을 달래는 무당이 붙기 마련이었다. 광희문 주변으로는 무당들이 몰렸고, 이들이 모시는 신이 자리한 ‘신당(神堂)’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동네 이름이 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신당(神堂)은 갑오개혁(1894~95년)을 거치면서 지금의 신당(新堂)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이름만 바꾸었지 그 자리는 묘가 계속 들어섰다. 그러다 서울의 팽창과 함께 개발의 전기를 맞는다. 서울 인구가 증가하면서 주거 시설이 부족해진 게 동력이었다. 도시계획이 새로 짜이면서 신당에는 대규모 주택 단지가 들어서게 됐다.

사실 신당은 예로부터 주거 지역으로 선호하던 곳은 아니었다. 도성 밖이라 인프라가 취약했고, 결정적으로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터에 신당은 움집과 토막집이 밀집한 조선 시대 대표적 빈민촌으로 꼽혔다. 그럼에도 지리적으로 신당은 시내와 접근성이 뛰어나 우선 개발 지역으로 꼽혔다. 왕십리·청량리 동북부권 개발의 중간 단계로서 신당은 짚고 넘어갈 지역이기도 했다. 이로써 신당리 묘지는 1929년 홍제동 묘지로 이전이 정해졌다.

개발은 일본 자본의 민간 주도로 이뤄졌다. 과정에서 이주 문제를 두고 갈등하다가 원주민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결국 성북동으로 이주하는 선에서 갈등이 봉합되고 묘지를 밀어냈다. 그 부지에는 일인과 조선 상류층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신당동과 면해 있는 장충동은 당시 고급 주택 단지로 조성돼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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