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25일(현지시간) 정규장까지 은행주의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미국 정부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의 고위험 투자를 막기 위해 도입했던 이른바 `볼커룰(Volcker rule)`을 완화하는 조치를 내놓자 은행주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상승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 마감 직후 갑자기 상황은 180도 바뀌어 버렸습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올해 실시한 은행권에 대한 스트레스테스트(Stress test·재무건전성 평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인데요. 은행주들은 하나 둘씩 마이너스(-)권으로 하락하더니 급기야 그 다음날인 26일 정규장에서는 적게는 4%, 많게는 7%에 이르는 급락세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사실 2008~2009년 금융위기 때나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 정도를 제외하고는 스트레스테스트는 은행주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는데요. 확실히 코로나19 시대의 스트레스테스트는 특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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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은행권 부실화에 따른 실물경제 쇼크를 목도했던 민주당 정부는 도드-프랭크법이라는 월가 개혁법안을 마련했고, 이 법 상에 경제가 위기상황을 맞을 경우 은행들의 자기자본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을지를 확인한 뒤 보다 튼실한 자본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도록 적시했습니다. 이렇게 위기상황에서의 은행 자본 건전성을 시뮬레이션하는 작업을 연준이 맡았고, 연준은 스트레스테스트라는 이름으로 매년 실시해 6월 중 발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라는 돌발 변수가 생긴 만큼 연준은 코로나19 팬데믹(전 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은행권 민감도 분석을 정밀하게 시행했습니다. 당초 2월에 극심한 경기 침체 하에서의 은행권 영향을 점검하는 식으로 설계됐던 만큼 미국 내에 코로나19가 창궐한 4월 초 민감도 분석이 추가됐습니다.
이 중 가장 비관적인 W자 회복일 때 실업률이 19.5%까지 올라갈 것으로 가정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33개 은행들은 적게는 5600억달러(원화 약 672조원), 많게는 7000억달러(840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대출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추산됐습니다. 이 경우 작년말 12%였던 은행권 총 자기자본비율은 7.7~9.5%로 떨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그 만큼 위기상황에 손실을 흡수해 줄 완충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지난 4월에 미국 실업률은 14.7%까지 치솟은 뒤 5월에 13.3%로 다소 개선되긴 했지만 코로나19 재유행이 나타난다면 19.5%까지 가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물론 이날 퀄스 부의장은 “아직까지는 은행들의 자본력이 양호한 상태라 극심한 경기 침체 시나리오에서도 견딜 만하다”며 우호적인 평가를 내렸습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연준은 현 상황을 반영해 각 은행들이 자기자본 상태와 (경기침체 시나리오 하에서의) 추가 자본확충 계획을 업데이트해 하반기에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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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장은 이 추가 자본확충 계획 제출과정에서 은행들의 체력이 드러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날 연준은 “극심한 경기침체 시나리오 하에서 `몇몇` 은행의 자본은 최소자본 요구조건 근처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 어떤 은행들이 그럴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애널리스트는 이 중 한 곳으로 골드만삭스나 웰스파고가 포함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은행들은 스스로 증자나 자산 매각 등 자본을 확충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해 보고서에 포함해야 합니다. 이 계획이 신통찮을 경우 연준은 해당 은행에 영업정지나 자기자본거래 중단 등을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은행 실적에 치명타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당장 은행들에게 닥친 문제는 자사주 매입과 배당 등 주주환원정책을 쓰기 힘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동안 주가가 지지부진했던 은행들은 2017년 전체 이익의 140%가 넘는 자사주 매입과 보통주 배당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2018년에 100%, 지난해에 120% 등 3년간 영업으로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주 몫으로 풀었습니다. 이제 이 길이 막힌다면 주가가 오르길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이는 은행 최고경영진들에게는 자리 보전이 위태롭게 됩니다.
이렇다 보니 레이얼 브레이너드 연준 이사는 이같은 발표 직후 별도로 성명서를 내고 “위기상황에서도 은행들이 현재 수준의 배당금을 줄 수 있도록 한 연준의 결정은 은행 자본의 완충력을 고갈시킬 수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이를 지지할 수 없다”고 반발했습니다. 브레이너드 이사는 현 연준 이사 중 유일하게 이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지명한 인사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코로나19가 좀더 길어진다면 연준의 조치도 차츰 수위를 높여갈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일단 이번 조치만으론 은행주 급락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긴 어려울 듯합니다. 벌써부터 월가 애널리스트들은 저가 매수 기회를 입에 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현재 미국 은행주들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을 보면 장부가 대비 극도로 낮은 주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마음 급해진 트럼프 행정부가 선물한 볼커룰 완화라는 호재도 있습니다.
다만 은행주가 꾸준한 반등이냐 재하락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시중금리에 민감한 은행들의 수익성은, 계속 하락하고 있는 순이자마진(NIM)만 봐도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향후 코로나19 재유행이 나타날 경우 또 한번의 크레딧 리스크나 대출 부실화 가능성도 잠복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행주의 한계가 코로나19 시대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은행들은 코로나19라는 위기상황에 위험도가 높은 대출을 선제적으로 회수하는 식으로 리스크 관리를 하긴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연초에 봤듯이 공격적인 대손충당금 적립을 요구하거나 이번처럼 배당을 제한하고 추가 자본 확충을 요구할 경우 이익이나 주가 변동성이 크게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정책당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은행주에 대한 디스카운트(할인)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잦아들지 않는 한 쉽사리 해소되긴 어려울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