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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1950년 11월 11일. 국군의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온 남자가 서울에 남아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2년 후 전쟁은 끝났지만 남자는 가족들이 있는 서울 신설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택한 곳은 북한이었다.
월북화가 이쾌대(1913~1965). 1988년 해금 때까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건 한국 화단에서 금기였다. 경북 칠곡 태생인 그는 할아버지가 지금의 검찰총장인 금부도사였고 아버지는 창원 현감이었다. 집 안에 교회와 학교, 테니스코트를 갖춘 부잣집 막내아들로 자랐다. 재능도 뛰어나 휘문고보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하며 일찍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공을 들인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이 오는 11월 1일까지 서울 중구 세종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월북작가의 대규모 전시를 연 건 이쾌대가 처음이다.
대표적으로 ‘군상’ 연작은 무리지어 있는 인물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이쾌대의 예술적 기량이 정점에 닿아 있는 작품이다. 역사와 신화, 종교 등으로부터 주제를 취해 각양각색의 사람을 특정 사상이나 이념을 표현하거나 재현해내는 ‘콤포지션’ 작품에 해당한다. 표정과 눈빛이 하나같이 형형하고 개성적인 각각의 인물이 어울려 거대한 서사를 이루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쾌대는 ‘콤포지션’을 처음 구현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동시대 작가였던 이중섭과 김환기, 유영국 등과 비교해보면 차별성이 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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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식도 돋보인다. 이쾌대는 여성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했다. 부인 유갑봉(1914~1980) 여사를 모델로 그리기 시작해 점차 운명에 맞서는 여성상으로 발전해갔다. 유교적 남존여비 사상이 남아 있던 일제강점기 한국 남성화가로서는 이례적이다. 여기에 한국적인 서양화를 모색하기 위해 동양화의 필선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질감 등을 녹여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좌우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에서는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하고 후학을 키우며 예술가로서 올곧은 신념을 지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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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던 이쾌대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왜 북한으로 향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독립운동가이자 기자였고 역사화가였던 친형 이여성이 북한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만 나올 뿐이다. 부르주아 출신에다가 자유로운 성향의 이쾌대는 북한에서도 이름이 지워졌다가 1990년대 후반에서야 복권됐다. 이쾌대의 작품이 세상에 다시 나오기까지는 부인의 역할이 컸다. 유 여사는 남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물품을 팔지 않고 자택 다락에 숨겨서 보관했다. 월북화가의 가족으로 살기에 지난 시절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끝까지 작품을 지켰다.
전시를 둘러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 광복 70주년 특별전으로 이쾌대를 선택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쾌대는 20세기 초반 거대한 역사의 격랑 속에서 민족의 앞날과 정체성을 고민하던 예술가였다. 작품들이 그 증거다. 제자인 남경숙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46년 말 북한에 다녀오신 선생께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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