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김영란 때문에'…텅빈 자선냄비에 한숨만

최순실 게이트로 불우이웃에 대한 관심 줄고 불신 늘어
사랑의 온도탑, 자선냄비 기부금 목표치 크게 밑돌아
김영란법 시행으로 법위반 우려에 자선단체 기부 감소
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기업들 기부 동참에 몸사려
  • 등록 2016-12-22 오전 6:30:00

    수정 2016-12-22 오후 4:30:43

2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앞에 놓인 구세군 자선냄비 주위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유현욱 기자)
[이데일리 고준혁 유태환 유현욱 기자] 20일 저녁 인파로 넘쳐나는 강남역 인근 도로. 구세군 자선냄비에 한 30대 여성이 지폐 몇장을 재빨리 밀어넣고는 종종걸음을 쳤다. 인터뷰 요청에 이 여성은 “올 한해 남을 도운 일이 많지 않아 부채감에 단돈 몇 천원이라도 넣은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박씨 이후 40여분이 지나도록 또다른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선냄비를 지키던 자원봉사자 김모(38)씨는 “성탄절이 눈 앞인데 기부하는 사람을 찾기기 쉽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의 온도탑 39.1도 그쳐

세밑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경기 침체 여파로 소비 심리가 위축된 상황에서 연말 도움의 손길도 움츠러 들었다.

해마다 이맘때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되는 사랑의 온도탑 수은주는 21일 현재 39.1도(목표액 3588억/모금액 1401억)를 가리키고 있다. 지난해 같은 시기에 47.3도(3430억/ 1621억)과 비교하면 한참 밑도는 수준이다. 지난 1999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연례행사인 나눔 캠페인이 시작된 이래 목표 모금액 달성에 실패한 것은 IMF 외환위기 여파가 컸던 2000년과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한국경제가 얼어붙었던 2010년 두 차례 뿐이다.

공동모금회 관계자는 “아직 모금 기간이 한 달 이상 남아 있다. 지난해에도 막바지에 기부가 몰리면서 100도를 달성했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달 1일부터 전국 386곳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한달 동안 모금활동에 들어간 한국 구세군 역시 사정이 녹록지 않다. 총 75억 8000만원의 목표를 세웠는데 이달 16일 기준 목표치의 20.6%(15억 6000만원)에 그치고 있다.

2년째 명동 자선냄비를 지키고 있는 이영섭(30)씨는 “작년에는 시간당 10명이 왔다면 올해는 6~7명 꼴”이라며 “기부 한파(寒波)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자원봉사자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같은 날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설치된 대형 자선냄비는 자원봉사자조차 없어 쓸쓸한 모습이었다. 차홍기 구세군자선냄비본부 홍보팀장은 “항상 자원봉사자가 모자랐는데 올해는 더 애를 먹고 있다”며 “챙길 곳은 많은데 보낼 사람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연탄 기부도 급감했다. 매년 12월말까지 평균 450만장 정도가 기부되는데 현재까지 기부된 연탄은 평년 대비 약 35% 적은 300만장에 그치고 있다.

동지(冬至)인 21일 서울 낮 기온이 12도를 기록하는 등 전국이 포근한 날씨를 보인 가운데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순실 게이트로 기부금 사용처 불신 팽배

올해 유독 심한 기부 한파는 만성화 한 경기침체 속에 ‘부패방지법’(김영란법) ‘최순실 게이트’ 등이 겹친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박효원 아름다운재단 홍보팀 간사는 “불황 속에 전반적으로 기부가 위축되고 있다”고 했고 배천직 전국재해구호협회 대외협력팀 차장은 “정기 기부는 그대로인데 연말연시에 주로 이뤄지던 일시 기부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영란법 시행으로 자선단체 대한 기부행위가 자칫 법 저촉 대상이 될수 있다는 우려에 몸을 사리는 기업과 개인도 늘었다는 후문이다.

특히 국정농단 사태로 온 국민의 이목이 ‘최순실 게이트’에 쏠리면서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한국기부문화연구소가 지난달 병원과 재단의 모금 담당자 2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40명(70%)이 ‘최순실 게이트가 기부에 부정적 영향을 줬다’고 답했다. 개인 기부가 줄어든 이유로는 90명(45%)이 ‘국민의 관심이 최순실 게이트로 쏠려서’라고 답했고 86명(43%)은 ‘최순실 게이트로 기부금 운용에 대한 불신이 커져서’라고 응답했다.

허기복(60) 연탄봉사단체 ‘밥상공동체 연탄은행’의 대표는 “최순실 사태로 온 국민의 정신이 한곳에 쏠려있다보니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여유들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진수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희망이 있어야 기부를 할 수 있는데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일종의 패배감이 생겨났다”며 “이런 국민적 분위기에 위축된 기업들도 기부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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