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단' 소통, '연희단거리패' 깽판…두 중견극단의 도전

- 극단 76단 40주년 작 '리어의 역'
기국서, 치매 노배우 삶 그려
"2012년 햄릿6 이후 온 정체기 돌파"
- 연희단거리패 30주년작 '벚꽃동산'
이윤택, 첫 무대구성·연출
"고사직전 연극판 흔들어 깨울 것"
  • 등록 2016-05-03 오전 6:16:00

    수정 2016-05-03 오전 6:16:00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이쯤 되면 헷갈린다. 그들이 연극인지 연극이 그들인지. 그들의 연극은 삶과의 경계선이 따로 없다. 올해로 마흔 살을 맞은 ‘극단 76단’과 서른이 된 ‘극단 연희단거리패’ 얘기다. 둘이 합쳐서 70년, 한국을 대표하는 두 극단이 나란히 생일을 맞았다. ‘거장’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굵직한 족적을 남겨온 극단들이다.

기국서 76단 상임연출·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1976년 서울 신촌 골목의 작은 극장에서 시작한 76단은 기국서(64)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지난 40년간 ‘햄릿’ 연작과 함께 ‘관객모독’(1979), ‘미아리 텍사스’(1990), ‘개’(1996), ‘루나자에서 춤을’(2002), ‘용산, 의자들’(2009) 등 시대를 성찰하고 인간을 탐구하는 수많은 문제작을 남겼다. 1986년 부산에서 창단한 연희단거리패는 독자적인 연극양식을 갖춘 실험극단으로 급성장했다. 이윤택(64) 예술감독을 주축으로 1988년부터 서울공연을 단행했다. 첫 작품 ‘푸가’(1986)로 시작해 ‘산씻김’(1988), ‘시민K’(1989), ‘오구’(1990), ‘방바닥 긁는 남자’(2009) 등으로 한국 현대연극을 주도해왔다.

이들이 생일을 자축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연희단거리패는 담론이 사라진 연극계를 반성한다며 초심으로 돌아가 ‘깽판’으로 맞서겠다고 했고 76단은 2012년 신작 ‘햄릿 6-삼양동 국회 옆에서’를 끝으로 겪어온 정체를 벗고 관객과 소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연희단거리패는 연극 ‘벚꽃동산’(15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을 공연 중이다. 지난 2월 ‘방바닥을 긁는 남자’에 이은 창단 30주년 기념작이다. 76단은 신작 ‘리어의 역(役·逆)’(8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6월 1∼5일 게릴라극장)을 준비했다. 기 감독이 4년간의 외도를 접고 대본을 쓰고 연출한 창작극이다.

극단 76단 ‘관객모독’ 뒤잇겠다

“일단 코미디를 쓰고 싶다. 엄청 웃긴 걸 쓰고 싶은 데 잘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목표는 엄청 웃기는 것이다. 하하.” 기 감독의 올해 계획은 ‘웃기기’다. 기국서 감독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2~3년 정도 삶의 즐거움을 모르고 정신이 계속 맴도는 정체기를 겪었다. 타개책은 없고 어두운 시기였다”며 “이번 신작이 광적이고 관념적인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40년 전 청년연출가에서 노장이 된 기국서 76단 예술감독이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리어의 역’의 한 장면. 극중 노배우로 등장하는 홍원기의 40분 간 독백이 작품의 백미다.
76단은 그간 부조리극 중심의 실험극운동을 표방해왔다. 기 감독의 친동생인 배우 기주봉을 비롯해 무용평론가 김태원, 송승환 PMC 프로덕션 예술감독, 배우 성동일이 거쳐 갔으며 국내 대표 연출가 박근형과 김낙형의 연극적 친정이기도 하다. 76단이 젊은 패기의 극단으로 각인된 건 1979년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초연하면서다. 줄거리와 별다른 장치 없이 관객과 즉흥적으로 만들어가는 무대는 파격이다. 이후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리어왕’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연극실험가로 떠올랐다.

기 감독은 “40년간 극단을 이끌면서 힘든 적도 많았지만 비단 경제적인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실 사람들과 소통이 안 된다고 느낄 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또 언제나 쫓기듯 작업해야 하는 여건이 굉장히 고생스러웠다”고 회상했다.

4년 만의 신작 ‘리어의 역’에는 기 감독의 연극적 소회가 담겼다. “연극을 한 40년 하다 보니 나이든 배우의 마음이 궁금해졌고, 나이를 먹다 보니 치매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치매에 걸린 노배우가 겪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그려보자고 했다. 평생 연기만 해온 배우는 참으로 존경스럽다. 그런 모습을 담고도 싶었다.” 이어 “내 20대의 기치는 ‘새로운 것’이었다. 기존의 것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공원이나 지하철에서 힘없이 앉아 있는 노인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고도 덧붙였다.

‘리어의 역’ 이후에도 76단의 여정은 이어진다. 아버지와 자식이 떠난 마지막 순례길을 그린 박근형 연출의 ‘죽이 되든, 밥이 되든’(18~29일 게릴라극장), 김난형 연출의 ‘붉은 매미’(6월 8~12일 게릴라극장)를 통해 현대사회 허와 실을 들여다본다.

연희단거리패 ‘게릴라 이윤택의 꿈’

러시아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 ‘벚꽃동산’은 이윤택 감독이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청년 이윤택은 10대에 ‘벚꽃동산’을 읽고 연극인의 꿈을 키웠다. ‘언젠가 무대에 올리고 싶다’던 그 소망은 이제야 이뤄졌다. 예순을 넘긴 이 감독이 이번에 처음으로 무대구성과 연출을 맡았다. 이 감독은 “지금 나와 마음 편하게 연극 할 수 있는 배우와 스태프로 이 정도를 표현해내는 것, 이게 내가 꿈꿨던 연극세계”라고 했다.

연극계 괴짜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고교시절 연극인의 꿈을 키웠던 ‘벚꽃동산’의 연출을 창단 30년만에 맡았다. 연희단거리패 특유의 위트와 유머는 물론 십수년을 함께 해온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작품은 이 감독 특유의 위트와 풍자를 통해 입체적으로 되살아났다. 이 감독은 “소작농의 아들 로파힌이 여자지주인 라네프스카야에게 보내는 긴 키스에 의해 비로소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루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동산을 완성한다”며 “그건 사랑의 힘”이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깽판’을 표방한 연희단거리패의 축제는 계속된다. 이 감독은 “창단 30주년을 맞아 우리 연극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 고민했다”며 “깽판을 치겠다는 건 고사 직전의 연극판을 다양한 시도로 흔들어 깨우겠다는 의미다. 정치적 틀에 갇힌 배우 유인촌과 명계남을 무대에 세우고도 싶다”고 설명했다. 8월 김소희 대표가 연출한 우리극연구소의 ‘오이디푸스’, 9월 중순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한 ‘햄릿’, 12월에 이 감독이 연출하는 베케트의 ‘앤드 게임’ 등이 그것이다. 기대작은 작가 윤대성(77)이 7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첫사랑이 돌아온다’(7월), 또 이 감독이 쓰고 연출한 신작 ‘꽃을 바치는 시간’(11월). 김소희·김미숙 등 관록의 배우들이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을 만난다.

연극 ‘리어의 역’(왼쪽)과 ‘벚꽃동산’의 한 장면(사진=극단 76단·연희단거리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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