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 지난 2월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쌍용차 지원과 관련해 이 회장의 입장은 명확하다. 대주주의 자구노력이 선행되어야만 산업은행의 지원 여부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정부와 산업은행이 쌍용차를 방치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을 깔고 떠보듯 여론전을 펴는 것에 대해 그는 불쾌감을 내비쳤다. 무조건적인 지원 배제는 아니지만, 일의 앞뒤가 있다는 게 이 회장의 소신이다.
하지만 원칙을 말하던 이 회장도 고민이 깊어졌을 것이라는 게 금융계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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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지켜야 하는데…쌍용차 지원 시험대
쌍용차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렸다. 쌍용차의 모기업인 인도 마힌드라는 지난 3일(현지시간) 특별이사회를 열어 신규투자 거부 의사를 밝힘에 따라 쌍용차는 9년 만에 다시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더 큰 문제는 쌍용차의 친환경차 개발에 제동이 걸렸다는 점이다. 쌍용차는 환경오염 이슈가 있는 디젤엔진을 주력으로 해 친환경차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마힌드라가 투자계획을 철회한 마당에 정부가 지원을 외면하면 쌍용차는 사실상 생존이 어려워진다.
산은은 아직까지 공식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산은 내부에선 과거 한국GM을 지원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산은은 지난 2018년 한국GM이 당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철수카드를 거론했을 때 경영정상화를 위해 7억5000만달러(약 8000억원)의 자금을 투입했지만, 당시 산은은 한국GM 2대 주주였다. 하지만 쌍용차의 경우는 산은이 주주가 아닌 채권자 입장이다. 대주주가 지원을 거부한 마당에 채권자가 나서서 먼저 지원한다는 건 산은 입장에선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쌍용차가 만약 무너지면 대규모 해고사태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은 정치적인 이슈다. 게다가 이달 총선을 앞둔 시점이다. 산은 내부에선 정치적 상징성이 있는 쌍용차 회생방안을 두고 지역 국회의원 등의 직·간접적 요청이 상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회장이 외풍을 든든히 막아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국책은행장으로서 지분 100%를 가진 정부의 뜻을 완전히 거스르기는 어렵다.
이미 조짐은 나타나기 시작했다. 6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공개서한을 통해 “채권단도 쌍용차의 경영쇄신 노력과 자금사정 등 제반여건을 감안해 쌍용차의 경영정상화를 뒷받침할 부분이 있는지 협의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쌍용차 지원 방안을 검토하라는 사실상의 주문인 셈이다.
두산중공업·항공업계 지원도 원칙 강조
외부의 압력 속에서도 산은은 원칙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현재 진행 중인 두산중공업과 저비용항공사(LCC) 업계 금융지원에도 마찬가지다.
산은은 유동성 위기를 맞은 두산중공업에 대한 1조원 금융지원을 하며 대주주 책임분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오너일가 3ㆍ4세 총 32명의 보유 주식을 자금지원 담보로 설정했고 비핵심 자산매각과 오너가 사재출연 등 요구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CC 금융지원의 경우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업계 전반의 재편을 강조하고 있다. 산은이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를 위해 최대 2000억원의 인수금융을 제공키로 한 게 대표적이다. 올해 국내 LCC 기업은 9개까지 늘어날 예정으로 미국(9개)과 일본(8개), 중국(6개) 등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다.
인수포기설까지 나오는 HDC현대산업개발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해서도 2조5000억원의 매수금액 등 계약의 기본사항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지난해 아시아나 매각작업을 예로 들며 “기업 구조조정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이번에도 정부 주도 대규모 금융지원과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다. 그가 강조한 원칙이 얼마나 준수되느냐에 따라 뒤탈없는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온통 아우성인 산업계는 국책은행인 산은을 쳐다보고 있다. 이 회장은 자신의 원칙과 전례 없는 위기상황이라는 양쪽을 놓고 저울질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의 임기는 오는 9월까지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5개월이다. 이 회장이 생사기로에 놓인 기업의 구조조정 작업을 어떻게 진두지휘할 것인가에 따라 국내 산업의 지도가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