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유리 상자에 갇힌 ‘한낱’ 인간들, 연극 ‘인간’

  • 등록 2016-12-30 오전 7:57:05

    수정 2016-12-30 오전 7:57:05

[리뷰] 유리 상자에 갇힌 ‘한낱’ 인간들, 연극 ‘인간’
유리 상자에 갇힌 남녀. 거기엔 지급되는 먹이와 물이 있고, 운동을 위한 쳇바퀴가 있다. 생존 조건은 충분하지만 갇힌 채 사육되는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이 난다. 연극 ‘인간’은 첫 시작부터 거대한 유리상자 안에 주인공 남녀를 가둠으로써, 인간은 존엄해야 한다는 인식에 칼끝을 겨눈다. 객석 위에서 내려다본 그들은 흡사 사육장의 토끼 같기도, 쳇바퀴를 돌리는 햄스터나 꾸물대는 벌레 같기도 하다. 허세와 권위가 벗겨지고 권능과 자본을 약탈당한 존재, ‘한낱’ 인간의 모습이다.   그 동안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며 자연 위에 군림해 온 인류 문명을 반성적 시각에서 비판한 소설과 영화들은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은 인간과 자연, 신과 우주를 향한 독특한 세계관과 기발한 상상력이 주목받아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연극 ‘인간’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유일한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으로, 2010년 충무아트홀에서 초연한 바 있다. 이번 공연은 6년 만에 문삼화 연출의 손을 거쳐 한국 상황과 정서에 맞게 원작이 일부 각색됐다.  인간 이성을 파괴하는 새 질서, ‘인간 길들이기’ 라울은 화장품 회사에서 동물 실험으로 인체안전성을 연구해 온 과학자다. 그는 거대한 유리상자에 갇힌 현재의 상황을 이성적 논리와 지성을 동원해 최대한 이해하려 한다. 결국 자신이 시청자들에게 생중계되는 서바이벌 생존 프로그램의 출연자일 것이라 판단 내린 라울. 함께 갇힌 서커스 호랑이 조련사 사만타 또한 그의 말에 따라 대중을 향한 우스꽝스러운 자기 어필을 시도한다.  화려한 스타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만타의 유쾌한 꿈은 바닥을 흐르는 전기 충격과 함께 산산이 깨진다. 누군가에 의해 원치 않는 모습에는 가학이, 원하는 모습에는 먹이와 부상이 주어지는 유리 상자 속 질서는 갇힌 인간을 철저히 길들여간다. 남녀는 생존을 위해 인간의 이성을 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필사적으로 습득한다. 먹이를 얻기 위해 사이좋은 척 연기를 하거나, 가까스로 얻은 식량을 두고 먹이 다툼을 벌인다. 지구에서 동물을 학대해 온 두 남녀가 지구 밖에서 외계인의 가학적 취미 대상이 된다는 설정. 여기에는 그간 반전 질서를 구축해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해 온 작가 특유의 시선이 잘 녹아 있다.  
 ‘인간’에 의한 ‘인류 재판’, 그 모순의 무딘 칼날 연극 ‘인간’이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인류라는 종족의 보존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인류 재판’ 장면에서 가장 또렷이 드러난다. 라울과 사만다는 스스로 변호사와 검사, 증인과 판사가 되어가며 인류의 죄악을 폭로하거나, 그 존속 가치를 열변한다. 라울은 지구가 이렇게 파괴된 것이 인류의 책임이라 지적하며 폭력과 침략의 인류 역사, 인간의 악랄한 범죄 행태를 그 근거로 삼는다. 한편, 사만타는 인류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정의의 편에 서고자 했던 선한 인물들을 예로 들어 인류가 시행착오를 거쳐 성장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또한, 인간이 추구하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유머를 나눌 줄 아는 고차원적인 특성을 통해 인류의 보존 가치를 증명하려 한다.  ‘인간’에 의한 ‘인류 재판’이라는 점은 그 자체로 모순을 가진다. 용의자가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심판할 수 없기에 애초에 그들의 논쟁 또한 무의미하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의 목에 겨누는 이 무딘 칼날이야말로 인간성(humanity)에 대한 관용과 애정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식을 보여준다. 라울과 사만타가 논쟁 끝에 “감히 우리가 같은 종족을 심판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인간만이 가진 차별적인 특성을 발견한다. 결국 인간은 이렇듯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깊이 성찰하며,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반성적 존재’라는 것이다.  미래적인 아담과 이브가 펼치는 2인극의 묘미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2인극의 묘미를 잘 살린 전개를 보여준다. 무대의 별다른 전환 없이도 처음 보는 남녀가 알 수 없는 한 공간에 갑자기 갇히게 되었다는 설정 자체가 긴장감과 호기심을 유발한다. 흰 가운을 걸친 남자와, 화려하고 파격적인 의상의 여자는 등장부터 그들의 정체에 주목하게 만든다. 그들이 서로의 수상한 정체를 탐색해나가는 동시에 관객 역시 그들의 정체를 하나둘씩 파악하게 된다. 갇힌 상황에 대한 그들의 엉뚱한 추리 역시 그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 관객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라울과 사만타는 최후의 인류이자 또 다른 인류 문명의 시작을 여는 유일무이한 남녀라는 점에서 성서 속 아담과 이브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들이 단순한 남과 여의 이끌림이 아닌, 서로에 대한 철저한 비난과 폭로로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은 태초의 순수한 아담과 이브와는 대조적이다. 그들은 다른 동물을 희생시켜 인류 생존에 기여해 온 과학자(라울)나 다른 동물을 길들여 인간의 유희로 삼은 동물조련사(사만타)로 살아왔다는 정체성을 근거로 서로를 비난하고, 스스로의 치부를 까발린다. 계속되는 그들의 치열한 탐색과 논쟁이야말로 극 전개의 동력인 동시에, 관객에게 인간에 대한 풍자적 메시지를 날카롭게 감지하게 하는 장치로써 기능한다. 
 감시하는 객석, 가학적이거나 이입하는 이중 시선 연극 ‘인간’의 객석은 무대의 양방향에서 무대를 둘러싸는 듯한 형태를 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이 자연스레 노골적인 감시자의 그것이 되게끔 한다. 갇힌 두 사람이 객석을 향해 유리벽을 두드려대며 절박한 얼굴을 할 때마다 관객은 그들을 가둔 가해자의 시선을 함께 체험한다. 마치 자신의 아바타가 발버둥 치는 것을 조종석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기묘한 체험이다. 극의 초반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아닐 때 지켜보는 감각은 다소 유쾌하다. 그러나 나 또한 미래에 그들의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는 현실감이 점차 다가올 때 그들의 불안은 객석에까지 확장 전이된다. 인간이 핵무기로 지구를 폭발시켜 자멸한다는 것, 최후에 살아남은 인류가 외계인의 한낱 애완용 가축으로 사육당한다는 설정은 그다지 신선한 반전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적인 설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류에 대한 그간의 오만한 착시들을 깨끗이 닦아내게 하는 효과가 있다. 파슈미르 분쟁이라는 실제 사건에 근거한 보도 영상 역시 생생한 현실감으로 객석의 웃음기를 지운다. 최후의 인류가 쳇바퀴나 돌리며 먹이를 구걸해야 하는 처지라니. 그 가차 없는 대우에도 어느덧 객석은 웃을 수가 없게 된다.  연극 ‘인간’은 그간 당연하게 여겨 온 ‘군림하는 인간’의 지위를 철저히 나약한 ‘사육당하는 존재’로 역전시킴으로써 인류의 본질과 존재 이유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물론 날카로운 질문에 비해 ‘인간이 결국 반성적인 존재이기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무른 결론은 끝내 인류의 이기적 자기애를 놓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가 사라진 이후 살아남은 최후의 인류를 개성적인 남녀 캐릭터로 재현했다는 점, 외계 존재가 인간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려 한 점은 충분히 흥미롭고 인상적이다.  ‘오만은 늘 파멸 직전에 찾아온다’는 스위스 철학자 카를 힐티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의 오만함이 불러올 끔찍한 미래를 마치 시뮬레이션해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을 우리는 진정성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극의 마지막에서 라울과 사만타가 “대를 이어 인류를 구하자”, “우리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잘 해낼 것”이라고 말하는 막연한 낙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관객은 그 안에서 충분히 뼈아픈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진출처_(주)그룹에이트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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