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회계 읽어주는 남자]기업 곳간엔 진짜로 현금이 넘칠까?

회계상 잉여금은 숫자에 불과…실제 '쌓아둔 현금' 아니야
S&P "삼성전자·현대차만 현금 보유량 증가…대부분은 순차입금만 늘어"
"내수부진은 가처분소득 성장 정체·가계부채 탓…국민 호주머니부터 채워야"
  • 등록 2015-09-12 오전 9:00:00

    수정 2015-09-12 오전 10:52:40

[이데일리 김도년 기자] 국정감사의 시즌입니다. 노동개혁이 먼저니, 재벌개혁이 먼저니 목소리가 높지요. 기업이 곳간에 현금을 쌓아두고 투자나 배당도 하지 않고 임금으로 나눠주지도 않아 내수경제가 엉망진창이라는 얘기도 합니다.

반면 기업은 늘 주머니 사정이 어렵다고만 하지요. 혹자들 말대로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게 진실인데 기업은 현금이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이건 기업의 현금 보유량을 재무제표에서 속이고 있는 일종의 분식회계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과연 ‘우리나라 기업이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는 명제는 맞는 얘기일까요? 이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먼저 사내유보금이란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의 재무제표 어딜 보더라도 사내유보금이란 항목은 없습니다. 재무제표에는 기업이 사업에 필요한 돈을 주주의 주머니에서 조달한 자본과 남에게 빌린 부채가 있고 이렇게 조달한 돈이 어떤 형태로 변해 있는지가 자산이란 항목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돈에는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으니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자기 돈에서 나온 건지, 남의 돈에서 나온 건지가 확실치 않지요.

회계적으로 볼 때 사내유보금은 기업이 사업을 해서 벌어들인 이익인 이익잉여금과 자본거래에서 생긴 자본잉여금을 더한 금액을 이야기하는데, 이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내유보금의 개념과는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사회적으로 쓰이는 사내유보금은 기업이 투자를 하지도 않고 쌓아둔 현금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반면 회계상 잉여금의 합계는 순전히 숫자에 불과한 개념이지요.

우리나라 회계에서 매출액은 현금이 들어온 것을 기준으로 하는 현금주의가 아니라 매출거래가 발생한 것을 기준으로 하는 발생주의를 토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상으로 팔아 실제로 현금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상품을 사고판 거래가 있었다면 매출액으로 인정하고 그중에서 매출원가와 판매관리비, 세금 등을 뺀 수치가 당기순이익이란 항목에 적힐 뿐, 순이익이 생겼다고 당장 현금이 들어온 것은 아니지요.

최대한 시중에서 널리 쓰이는 사내유보금의 개념과 가까운 것을 찾는다면, 배당가능이익이나 현금 및 현금성 자산 항목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배당가능이익은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 중에서 주주들에게 배당할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는 기업이 뭔가 여유 있게 쓸 수 있는 유보금의 개념으로 볼 수가 있겠지요. 현금 및 현금성 자산도 그야말로 이윤 추구에 투입되지 않은 이른바 무수익(無收益) 자산인데, 비싼 금리로 돈을 빌려 현금으로 쌓아두는 바보는 없을 테니 이 돈도 유보금의 개념으로 볼 수가 있겠네요.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곳간에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는 건 맞는 명제일까요?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상위 150대 기업 중 삼성전자(005930)현대차(005380)를 뺀 대부분 기업의 최근 5년간 순차입금은 40%가 늘었습니다. 대부분 빚만 늘었고 삼성전자와 현대차만 현금성 자산 보유분이 늘어나는 양극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또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빼면 급하게 필요한 유동성 부족분을 보유 현금이 아니라 새롭게 빚을 내 해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기업의 곳간이 현금으로 가득하게 채워지고 있는 게 아니라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제외하면 빚으로 채워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보면 정부가 강력하게 드라이브 걸고 있는 임금피크제 도입 등 노동개혁은 사실, 기업의 인건비를 줄여 수익성을 높여주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겠지요.

내수경제가 엉망인 것은 그럼 무엇 때문일까요? 나이 든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하지 않아 청년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아서? 기업이 투자는 하지 않고 현금만 쌓아둬서?

다시 S&P의 얘기를 들어봅시다. S&P는 내수시장 부진은 국민의 가처분소득 성장이 정체되고 가계부채가 늘어난 것을 먼저 꼽습니다. 국민 호주머니에 자기 돈은 없고 빚만 가득한 것이 결국 돌고 돌아 기업의 영업이익률 하락에 일조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기업이 상품을 생산해도 이걸 사줄 국민이 없단 얘깁니다. 값싼 중국산 휴대폰에 삼성전자가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가처분소득 성장 정체와 맞물리지요.

S&P의 분석 내용은 사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긴 합니다. 소득주도성장론과 가계부채 해결 과제는 우리 정부가 스스로 강조했던 사안들이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와 자식 세대 간 갈등만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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