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기획]회사·상표·제품名, '이름에 울고 웃고'

  • 등록 2012-10-08 오전 8:54:05

    수정 2012-10-08 오후 1:09:09

[이데일리 문정태 기자]한글날은 지난 1991년 국경일과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그러다 2005년에 다시 국경일로 지정됐지만 공휴일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 탓일까? 올해 한 조사에 따르면 10월9일이 한글날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국민은 64%에 불과했다.

그동안 기업들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1992년 매출액 기준 상위 30개 기업 가운데 회사 이름에 영어가 들어가는 곳은 LG상사, LG전자, LG화학, LG건설 등 LG 계열의 회사들뿐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기존 기업 중에서는 SK(옛 선경)나 CJ(제일제당)처럼 영어로 이름을 바꿔 단 곳이 있고, 기업 인수합병이나 계열분리 등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회사 중에는 STX, OCI, LS처럼 영어로 이름을 지은 곳이 많다.

회사 이름뿐만 아니다. 요즘 새롭게 선보이는 제품이나 상표(브랜드) 중에는 그 뜻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이름이 많다. 한글날을 기념해 기업·상표·제품의 이름 때문에 울고 웃는 현실을 짚어 봤다.[편집자 주]

◇ 외국어를 잘못 써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상표 ‘Anycall’의 로고
외국어를 잘못 써서 구설에 오른 상표는 여럿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삼성전자의 애니콜(anycall)이다. ‘한국지형에 강하다’라는 카피로 유명한 애니콜은 삼성전자가 지난 1994년 10월부터 쓰기 시작한 브랜드다.

하지만 영어로 ‘anycall’은 영어권 지역에서 ‘거리의 여자’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 논란이 일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애니콜 상표를 한국과 중화권을 제외한 국가 대부분에서 삼성모바일(Samsung Mobile) 상표를 사용했다.

삼성전자의 휴대전화의 대표 브랜드는 ‘갤럭시’(GALAXY)로 대체됐다. 갤럭시 시리즈의 출시 초기에는 애니콜이 붙기도 했지만 갤럭시S2 이후부터는 사라졌다. 지금은 삼성의 일부 휴대전화(일명 피처폰)에만 사용되고 있다.

LG전자의 휴대전화도 비슷한 경우다. 일명 ‘초콜릿’과 ‘샤인’으로 불리던 제품들이 인종차별적인 의미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샤인(shine)’은 ‘반짝거리다’ ‘광채’ 등의 뜻이 있는데, 이 단어는 흑인을 비하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기 때문. 2005년에 출시한 ‘초콜릿(Chocolate)’폰 역시 비슷한 지적을 받아 곤란을 겪었다.

편의점 CU(옛 보광훼미리마트)의 로고
최근에는 편의점 ‘CU(옛 훼밀리마트)’가 상표 이름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광훼미리마트를 운영해 왔던 BGF리테일이 상호를 ‘CU’로 변경하자 일부 가맹점주들이 반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며 갈등이 커지고 있다.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은 비단 점주들뿐만 아니다. ‘CU’가 ‘CVS for You(당신을 위한 편의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게 회사의 설명이지만 “간판만 바꿔 달았을 뿐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경우지만, 일본 화장품 브랜드 SK-Ⅱ가 SK그룹과 관계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제품은 일본 화장품브랜드(에스앤에스 인터네셔날)이며, 국내 판권은 한국피엔지가 보유하고 있다. SK-Ⅱ의 가두점 사업에는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의 막내딸 장정안씨가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한글을 잘못 써서…

최근 KBS가 새 연속극의 제목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남자’라고 지었다가 논란이 일었다. 이에 한글학회는 “이번 연속극 제목의 ‘차칸남자’ 표기는 방송이 국민의 올바른 국어 사용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차칸남자’를 올바른 표기로 바꾸어 방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KBS는 ‘창작의 자유’를 내세우며 버텼지만 여론이 나빠지자 결국 꼬리를 내리고 ‘착한 남자’라고 제목을 고쳐야 했다.

KBS뿐만 아니라 한글 파괴에 일조하는 기업들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회사 중 하나가 풀무원이다.

풀무원은 지난 2004년부터 ‘바른 먹거리’ 캠페인을 진행해 왔다. 이미지는 풀무원의 홈페이지의 캠페인 사이트.
풀무원은 지난 2004년부터 ‘바른 먹거리’라는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올바른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이 캠페인은 좋은 의도에도 한글조성의 기본원칙을 깼다. (이런 식이라면 볼거리는 ‘보거리’, 즐길거리는 ‘즐기거리’로 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TV와 라디오를 통해 음악과 함께 “바른 먹거리 풀무원”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지고,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페인이 1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결국 ‘먹거리’라는 말이 표준말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잘못된 표기법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유명 제품과 기업도 있다. 롯데제과가 생산·판매하고 있는 빙과류 제품인 ‘설레임(설렘)’과 식품 기업인 오뚜기(오뚝이)도 틀리게 쓴 단어들이다. 이들 단어는 한글맞춤법에서도 틀린 말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영향력이 큰 기업들을 통해 우리말이 오염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지만, 국립국어원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어원 관계자는 “‘먹거리’라는 단어는 비통사적인(문법에 맞지 않는) 합성어지만 널리 사용되고 있어 표준말로 인정했다”며 “기업이나 제품명에 잘못 쓰이고 있는 우리말을 정리하거나 일깨우는 일은 별도로 하지 않아 왔다”고 말했다.

한글을 잘 써서…

지난 1995년 중견기업인 만도기계(현 위니아만도)는 ‘딤채(김치의 고어)’라는 이름의 김치냉장고를 출시했다. 자동차·건물의 냉방시스템 쪽에서 기술력을 다져온 이 회사가 냉장고 시장에 진출하면서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장을 발굴한 것.

위니아만도의 김치냉장고 ‘딤채(왼쪽)’과 롯데주류의 소주 ‘처음처럼(오른쪽)’
곧바로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의 추격이 시작됐다. 하지만 ‘딤채’는 2000년대 후반까지 1위를 유지했다. 그러다 2008년 삼성이 ‘스탠드형’의 제품으로 소비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지만 ‘딤채’는 여전히 김치냉장고의 대명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롯데주류의 소주 ‘처음처럼’은 한글 덕을 톡톡히 보며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한 제품이다. 2006년 2월 출시된 이 술은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쓴 제품 이름 ‘처음처럼’이 제품명으로 쓰여 화제가 됐다. 덕분에 후발주자였던 롯데주류는 막강한 상대인 하이트진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파고드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올해 상반기 기준 15%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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