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환의 크레딧스토리)신용 순환이 달라진다

  • 등록 2008-07-21 오전 9:16:35

    수정 2008-07-21 오전 9:16:35

[이데일리 윤영환 칼럼니스트] 자본주의 경제에는 세 종류의 순환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투자와 소득, 소비가 맞물려 돌아가는 실물경제의 ‘케인지안 순환’이다. 다른 하나는 금융시장 내부의 ‘유동성 순환’이다. 저금리로 유동성이 늘면 자산가치가 올라가고, 또 이것이 유동성 팽창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이 금융시장 내부의 유동성 순환에 머물러 있는 자금을 실물경제의 케인지안 순환으로 이어주는 ‘신용 순환’이다.

통화정책당국이 경기 활성화를 위해 금리를 낮추면 처음에는 유동성 순환만 작동하며 자산가치만 올라가다가(유동성 거품), 어느 순간부터 신용 순환이 작동하여 자금이 금융에서 실물로 넘어간다는 것이 보편적인 시나리오다.

2000년 이후 지속적인 정책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투자가 확대되지 않았던 것은 우리의 신용시스템이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면서 제대로 신용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2005년이 되면서 갑자기 대대적인 신용 순환이 시작된다. 막상 정책금리는 이때부터 7번씩이나 올랐지만 한번 시작된 신용 순환은 계속 확대되었다.

“역사는 우연을 매개로 필연을 관철한다(E. H. Carr)”고 했던가? 신용 순환의 시작은 평범했다. 2005년 3월 기업은행장은 월례 조회를 통해 우량 중소기업 유치에 적극 나설 것을 역설한다. 이렇게 시작된 우량 중소기업 쟁탈전이 2005년 말에는 대기업 사모사채로 확대되고, 또 대대적인 건설PF와 M&A 대출로 이어졌다. 카드위기로 위축되었던 은행들이 자산 대전에 돌입하는 역사적 필연이 관철된 것이다.

3년간에 걸친 ‘은행 대전’은 서브 프라임 이슈를 계기로 높은 예대율과 부동산 거품의 압박을 자각하면서 빠르게 막을 내리고 있다. 또 바젤Ⅱ(신BIS)라는 새로운 리스크 관리기준의 등장도 한 몫을 했다. 하지만 신용 순환의 둔화를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또 하나의 대폭발(Big bang)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2009년 2월이면 ‘자본시장 통합법’이 시행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증권사들은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고, M&A와 신규 진입이 줄을 잇고 있다. 바야흐로 ‘증권 대전’의 서막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신용 순환을 돌아보면 어김 없이 반복되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 바로 ‘경쟁’이다. 금융기관 사이의 생사를 건 경쟁이 필연적으로 거대한 신용 순환을 만든다.

전쟁에 참가하는 선수가 다르니 양상은 변하겠지만 그렇다고 경쟁의 치열함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벌써 증권거래 수수료는 한계 수준에 접근하고 있고, 각 증권사의 자기자본투자(PI)는 이미 수 천억원을 넘어 조 단위를 헤아리고 있다. 어떤 증권사는 대대적인 영업 네트워크 확대를 마쳤고, 조직을 PI 중심의 매트릭스 구조로 재편하는 흐름도 확산되고 있다. 증권 대전의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다.

증권시장의 다층 구조(Multi culture)로 인해 증권 대전은 은행 대전보다 훨씬 다양한 층위에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회사채 시장은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전장이기 때문이다. 은행의 대대적인 대기업 사모사채 인수로 큰 타격을 받았던 회사채 시장이 은행 대전 이후의 최대 전장으로 떠오르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치열한 전쟁은 시장의 규모를 키울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2~3년 뒤의 회사채 시장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몇 번의 신용위기에 가위눌린 투자자들에게 회사채 시장의 확대 전망은 몽상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두렵고 미덥지 못하고, 또 그래서 조금 더 관망하고 싶어도 경쟁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일단 레이스가 시작되면 더 이상은 망설일 여유가 없다. 게으른 자에게는 두 가지 징벌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나의 실패요. 둘은 남의 성공을 지켜보는 배아픔이다(J. Renard). 결국 ‘질투는 나의 힘(Jealousy is my middle name)’이다. 한 발 먼저 움직여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것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다.

미국 신용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있었던 1990년 S&L(주택대부조합)사태와 2001년 엔론 위기 당시를 살펴보자. 초기에는 은행 대출과 회사채 시장 모두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위기의 본격화 이후에는 은행 대출은 상당기간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회사채는 그 빈자리를 채우며 가일층 성장했다(그림 상단 참조).
 


우리의 경험은 사뭇 다르다. 우리 회사채 시장은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 시장의 경색과 은행의 구조조정으로 외형이 갑자기 확대되었지만, 시스템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인 시가평가 도입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대우와 현대 사태(1999~2000년)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연이어 2001년 말에는 대규모 만기 도래를 속절없이 지켜 보는 통한을 겪었다.

하지만 2008년 회사채 시장의 시스템과 역량은 크게 달라졌다. 작금의 은행권을 짓누르고 있는 건설/부동산업의 신용이슈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던 점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다. 이제는 강화된 역량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때가 되었다.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은행 대출의 위축이 회사채 시장 도약의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하는 가장 큰 이유다.

물론 과제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회사채 시장의 리스크 관리 역량은 강화되었지만 유통 기반과 투자 문화는 크게 위축된 상태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의 시장 위축으로 시장 참가자 스스로가 자신감을 잃고 있다. 그래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미 구르기 시작했다. 지난 1년 동안 회사채는 모두 10회의 순발행(월간)을 기록했다. 메마른 대지가 물을 머금듯 회사채 시장의 신용 순환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나아가 최근 은행의 M&A 금융 주도에 대한 당국의 문제 제기에서 보듯이 정책 방향도 회사채 시장에는 맞춤의 순풍이 되고 있다.

다만 소위 ‘비우량 회사채’의 소외는 이 단계에서 회사채 시장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큰 과제다. 특히 은행 대출의 위축은 중소기업 신용대란의 우려(그림 하단 참조)로 이어지며 정책적 대응이 부산하다.
 
이 기회에 회사채 시장의 묵은 과제 몇 가지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펀드신용평가가 도입되고 하이일드 시장으로의 접근이 훨씬 용이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기회로 받아들이고 과감히 도전하는 회사채 시장의 ‘투자자 본능’이다.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Credit an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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