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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인천에 사업체를 두고 있는 중소기업의 사장 A씨. 그는 60대에 접어들면서 큰 고민이 하나 생겼다. A씨는 “평생 피땀으로 일군 회사를 외부에 팔지 않고 자녀들에게 물려주겠다는 확신은 섰다”면서도 “문제는 그 방법”이라고 토로했다. 현재 가업상속공제 제도는 어떠한지, 상속세 자금은 어떻게 마련할지 등 딱 떨어지는 게 별로 없는 탓이다. 그는 결국 오랫동안 주거래은행으로 관계를 유지했던 B 은행 영업점의 문을 두드렸고, B 은행 본점의 컨설턴트와 상담을 하고 있다.
사람과 똑같이 기업도 늙는다. 최근 국내 경영자의 고령화가 두드러지면서 기업 세대교체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가업 승계다.
가업 승계는 인구구조의 변화와 밀접하다. 이웃나라 일본부터 그렇다. 일본은 일본판 베이비부머 단카이 세대(1947~49년생)의 은퇴와 함께 중소기업의 후계자 선정이 적기에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오는 2025년 70세를 넘는 중소기업 경영자 245만명 중 127만명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 ‘산업계 뿌리’ 중소기업이 흔들리면 경제에 치명타인 건 자명하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단카이 세대보다 10년 안팎 뒤에 등장한 베이비부머 세대(1955~63년생) 이후에 대한 해답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실태조사 당시 “가업 승계 방법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응답이 40.4%나 됐다. 일본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 한다는 기류는 강하지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중소·중견기업은 부지기수인 셈이다.
가업승계 완료된 중견 9.7% 중기3.4%
15일 IBK경제연구소가 한국기업데이터 재무정보(2013~2017년)를 활용할 수 있는 법인 9만7500개사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현재 가업 승계가 완료된 기업은 3426개사(3.5%)에 불과했다. 이 중 중견기업의 경우 9.7%로 그나마 높았지만, 중소기업은 3.4%에 그쳤다. 김기훈 IBK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가업 승계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1세대 창업자가 여전히 경영을 이끌고 있는 회사는 5만1256개사로 절반 이상(52.6%)이었다. 앞으로 가업 승계 이슈가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다.
최근 KB국민은행이 은행권 최초로 출시한 ‘KB가업승계신탁’ 상품은 그런 점에서 주목 받고 있다. 이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보유한 주식을 은행에 신탁하고, 본인 사후에 미리 지정한 승계자에게 상속하는 게 골자다. 별도의 유언 없이도 신탁계약에 따라 경영권 분쟁 없이 원활하게 가업 승계를 지원하는 장점이 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가업 승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중소·중견기업의 애로사항을 반영한 상품”이라고 했다. KB국민은행은 재산 상속과 관련된 상속·증여·세무 상담 서비스도 제공한다. 윤종규 KB금융 회장도 기업금융 확대 차원에서 이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이 늙으면서 퇴직연금 상품이 중요해지는 만큼 기업이 늙으면서 가업승계 상품도 중요해질 것이라는 게 은행 측 복안이다.
“승계 요건 완화해야” 볼멘소리도
가업 승계를 통한 거래 기업 확보는 은행권에도 이익이다. 시중은행 한 인사는 “기업 유치는 영업점의 1년 장사를 좌우한다”며 “급여계좌, 퇴직연금, 법인카드, 직원대출, 외국환거래 등을 일거에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은행 중소기업전략부가 최근 컨설팅한 중소 제조업체 C사가 좋은 사례다. 컨설팅팀은 △회사 현황 검토 △단순증여, 단순양도, 가업승계증여, 가업승계상속, 주식교환 등 각각의 경우에 대한 세금 분석 △절세 방법 권유 등을 진행했고, C사는 그 제안대로 가업을 이어갔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컨설팅 이후 해당 기업으로부터 추가 거래를 유치했다”고 전했다.
금융권에서는 승계 요건 완화에 대한 볼멘소리도 동시에 나온다. 예컨대 가업상속공제 수혜를 받은 이후 요건이 워낙 엄격해 이른바 ‘모자 바꿔쓰기’까지 고려하는 게 현실이라는 토로다. 모자 바꿔쓰기는 후계자가 새로운 법인을 설립해 매출을 이전하고 기존 사업장을 폐업하는 것을 말한다.
또다른 시중은행의 컨설턴트는 “가업상속공제 후 적용되는 업종 변경 제한과 고용 유지 요건 등이 너무 엄격하다”며 “4차 산업혁명 들어 업종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인력 구조가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사후요건도 유연하게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