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자살사회인가 복지 포퓰리즘인가…갈림길에 선 韓경제

  • 등록 2017-12-27 오전 6:00:00

    수정 2017-12-27 오전 6:32:38

△지난달 초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장(세텍)에서 열린 ‘서울 베이비 페어’에서 방문객들이 육아 용품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세종=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참여정부가 저출산·고령화, 양극화 등에 대비하겠다며 2006년 발표한 초장기 전략인 ‘비전 2030’은 당시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 임기를 불과 1년 반 정도 남긴 힘 없는 정부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근본은 ‘세금 폭탄’ 논란에 있었다. 2030년까지 설계대로 복지 투자를 확대하려면 1000조원 넘는 재원과 증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승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계획대로 정책을 추진한다면 막대한 세금 부담으로 인해 현재의 20대와 30대는 죽었다고 복창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비전 2030은 그대로 공무원 캐비닛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선택은 어떨까. 당시의 위험 요인은 이제 더 실체적 위협으로 한국 사회에 성큼 다가섰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말대로 현 추세가 이어지면 한국은 ‘집단 자살 사회(collective suicide society)’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의 우울을 해결하기 위해 당장 나랏빚이나 세금을 더 내자니 아깝다. 성과도 모르겠다. 한국 경제는 그렇게 갈림길에 섰다.

韓 복지지출 선진국 중 ‘꼴찌’

정부가 가진 정책 수단은 보통 돈(재정)과 인력, 규제로 나뉜다. 이 중 우선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참여정부가 그랬듯 재정이다.

26일 국제기구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일단 주요 선진국보다 저출산·고령화, 양극화 등 미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쓰는 돈이 절대적으로 적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 사회 지출 비중은 지난해 1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21%에 크게 못 미친다. 나라별로 순위를 매길 경우 한국보다 복지에 적은 돈을 쓰는 국가는 OECD 국가 중 멕시코(2012년 기준 GDP의 7.5%)뿐이다. 사실상 선진국 중엔 한국이 꼴찌다.

애초 비전 2030은 정부의 복지 지출을 오는 2019년 GDP의 15%(2001년 미국 수준), 2024년에는 17%(2001년 일본 수준)까지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구체적인 재정 계획을 연계해 실천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복지 확대라는 방향성은 같았지만, 이후 정부에서 그 속도를 늦췄기 때문이다. 실제로 참여정부(2003~2007년)에서 GDP의 2%포인트만큼 증가했던 복지 지출은 이명박 정부(2008~2012년)와 박근혜 정부(2013~2016년)에서 각각 1.1%포인트 느는 데 그쳤다. 증가 폭이 반 토막 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에 치중하고, 박근혜 정부는 이전 정부의 감세로 쪼그라든 나라 곳간을 물려받아 재정 여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재정 확대는 여전히 ‘논란’

문제는 재정 투자 확대를 놓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는 점이다. 정부로서는 가장 중요한 정책 수단 하나가 묶인 셈이다. 이는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당시 세출 예산을 동결하기까지 하며 쌓아 올린 재정 건전성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결코 해쳐서는 안 될 가치로 공고해진 영향이다. 증세의 정치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사람 중심 투자’를 전면에 내건 문재인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새 정부가 첫 편성한 내년 복지 예산은 올해 본예산 대비 11.7%, 추가경정예산 대비 9.7% 늘어난 규모다. 여기서 내년 최저임금 인상액을 보전하기 위해 편성한 3조원 규모 ‘일자리 안정 자금’을 빼면 내년 복지 예산 증가율은 7.4%(올해 추경 예산 대비)로 내려간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5년 8.7%보다 낮은 수준이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복지 지출을 늘리는 방향성은 맞는다”면서도 이런 의사 결정이 쉽지 않은 이유가 “일본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억 총 활약상(장관)’ 직책까지 신설한 것과 달리, 우리는 아직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은 아니어서 저출산이 심각하게 와 닿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복지 사각지대 줄여야” 지적도

물론 돈 푸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양극화는 각각 원인이 복합적인 만큼 맞춤 처방이 필요해서다. 김 교수는 “저출산은 교육과 양성평등 등 다양한 요인이 맞물린 문제여서 정부 지출만 늘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양극화도 복지 만이 아니라 공정한 이익 배분 등 기본적으로 경제 구조 개선과 같이 가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복지의 내실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불필요한 지출과 사각지대를 줄여 나랏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도록만 해도 충분히 재정 지출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의 경우 사회 안전망이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갖춰져 비정규직 등 취약 계층은 외려 정부 지원 밖에 놓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반면 참여정부 이후 복지 정책 다수가 정치 공약을 통해 새로 도입되면서 ‘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산층·정규직 노동자 등의 이해관계가 과잉 반영된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12년 내놓은 ‘근로장려세제로 본 복지 정책 결정 과정의 문제점’ 보고서를 보면 2011년 기준 일용직 근로장려금 수급자의 9.1%는 고용주가 국세청에 소득 자료를 내지 않자 스스로 증거 자료를 내 수급권을 인정받았다. 근로장려금은 일하는 저소득 가구에 정부가 소득을 보조하는 제도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사업주가 과세당국에 소득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증빙 서류를 내지 않을 경우 저소득 노동자는 국세청으로부터 장려금 신청 안내조차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KDI의 2011년 ‘기초노령연금의 존재 의의와 재편 방향’ 보고서는 고령층 가구끼리 비교한 소득 불평등이 비 고령층 가구나 전체 가구보다 높다는 점을 짚는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나 그 안에서도 격차가 큰 만큼 소득 하위 70%라는 광범한 대상을 모두 지원할 것이 아니라, 사정이 더 어려운 노인에게 지원을 몰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복지의 보편성과 선별성은 ‘도움이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하지 못할 위험’과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도와줘 재원을 낭비할 위험’ 사이 경중을 가려 결정할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정치적 의사 결정은 이를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보편적 복지로 기우는 경향이 강하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정부가 신혼부부·청년·여성 등을 위한 종합적인 지원 로드맵을 만들면서도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인 영세 자영업자를 위한 대책을 내놓은 것을 본 기억은 없다”면서 “사회 안전망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한 특단의 대책도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참고 기사 <본지 4월 11일자 '[팩트체크]나랏빚 늘면 경제위기 온다?'>

<5월 1일자 '외환위기 20년의 슬픈 자화상, 빈곤층만 소득 11% 줄었다(종합)'>

<8월 29일자 '복지 확 늘리겠다더니…文, 알고보니 ‘짠돌이 산타클로스’'>

<11월 14일자 'IMF의 일침…“韓정부, 나랏돈 연 9兆 더 풀어 저소득층 지원해야”'>

<11월 15일자 'IMF '韓정부 돈 더 풀어 취약계층 지원해야' 지적에…김동연 “귀담아 들어야”'>

<12월 21일자 '韓 소득불평등 OECD '최악'인데…대통령·장관도 피해간 증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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