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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배달 체험을 하겠다며 나선 나에게 동기들은 부러움 섞인 눈길을 보냈다. TV방송 프로그램 ‘체험 삶의 현장’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혈기왕성한 청춘에게 그깟 연탄 배달쯤 대수랴 싶었다. 연탄 배달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로 한 날 아침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떨어져 내복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내려 1143번 버스를 타고 10여분쯤 가니 거사(?)를 치를 ‘백사마을’에 도착했다. 행정구역상 서울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여서 백사마을로 불리는 이곳은 불암산자락에 있는 고지대 달동네 마을이다.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들을 보니 마치 1960~7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은 영화 세트장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곳에 사는 1000여 세대 중 600세대 이상이 아직 연탄을 땐다.
한화테크윈이 서울연탄은행에 기부한 연탄 2만장 가운데 2000장을 백사마을 14가구에 배달하는 게 오늘의 미션이다. 한화테크윈 임직원 40여명이 같이 한다니 2000장 정도는 가뿐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전 9시 30분 연탄배달이 시작됐다. 앞치마와 팔토시를 착용한 뒤 딱 성인 남성 등을 가릴 만한 크기의 나무 지게를 지고 긴 대열에 섰다. 장당 3.6㎏의 연탄 4장이 지게 위에 얹힌 순간 ‘할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섣부른 착각이었단 걸 깨닫기까지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1세트(4장)를 내려놓고 왔을 뿐인데 허벅지는 터질 것 같았다. 괜히 내복을 챙겨 입었단 생각이 들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자 옆에 있던 허기복 연탄은행 대표가 “경사가 가팔라 서울 지역에서 연탄을 사용하는 곳 중 백사마을은 배달이 가장 까다로운 곳”이라며 웃었다. 왕복한 길을 돌아보니 경사가 스키장 최상급 코스(30도)는 되어 보였다.
지게를 매고 경사로를 올라 각 가구에 내려놓고 오는 과정은 먹이를 옮기는 개미떼 행렬을 떠올리게 했다. 행렬 중간 중간 안내원들이 어느 집으로 가야 할지를 알려줬다. 한 가구에 할당된 연탄 개수를 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게를 지고 들어갈 수조차 없는 좁은 골목 끝 집에는 자원봉사자들이 한팔 간격으로 나란히 선 채 손에서 손으로 연탄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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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남짓 지났을까 후들거리는 두 다리는 이미 내 몸이 아닌 듯 했다. 잠시 연탄을 배달한 집주인 할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김모(79)할머니는 “매달 30만원 정도의 정부 보조금을 받는데 월세 15만원을 내고 남은 돈으로 생활하려면 빠듯하다. 연탄 기부가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이 곳 주민들은 대부분이 70~80대 노인들로 홀로 사는 경우가 많다. 김마리아(78·여)할머니는 연탄을 내려놓을 때마다 허리를 숙여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김할머니는 “올해 연탄 공급량이 작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하던데 큰일이다. 전기장판을 쓰면서 연탄은 하루에 한장씩만 때야겠다”고 했다.
어느덧 약속했던 배달 종료 시간이다. 미처 다 배달하지 못한 300장은 연탄은행 직원들이 오후에 마저 배달한다고 했다. 힘이 풀린 다리로 백사마을을 터덜터덜 내려오면서 골목 어귀마다 쌓여 있는 연탄재가 눈에 띄었다. 문득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유명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인간의 바둑 대결이 펼쳐지고 모든 것이 연결된다는 사물인터넷(IoT) 세상을 앞두고 아직도 연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삶이라니…. 이유 모를 죄책감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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