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 제주에서 은퇴 생활을 하는 김권식씨가 부인 신보순씨와 함께 자신이 일군 밭에서 나무를 돌보고 있다.김씨는“시골에서 살면 노후 생활비는 12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 |
“아침에 일어나면 곧장 밭으로 나와 풀을 뽑고 나무를 가꿉니다. 마지막 직장인 창원특수강(포스코 계열사) 사장직에서 물러나 제주로 온 게 작년 3월이니 벌써 1년6개월이 지났군요. 이제 ‘초보 농군’의 딱지를 뗀 것 같습니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에 밀짚모자를 눌러쓰니 그의 모습은 영락 없는 시골 아저씨다. 8000명의 부하 직원을 호령하던 광양제철소장 시절의 자취는 온데간데없다. 은퇴 생활의 첫 번째 덕목이 ‘옛날의 지위를 빨리 잊는다’는 것이라면 김씨는 과거를 잊는 데는 확실히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샐러리맨들은 도시 생활이 힘들어질 때마다 마음 속으로 ‘은퇴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을 꾼다. 그러나 꿈을 현실로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녀와 친구들, 생활 터전이 있는 도시를 선뜻 떠난다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은퇴 후 귀향에 성공한 김씨는 ‘행복한 사나이’가 확실하다.
“노후를 시골에서 보내려면 아내의 지지가 꼭 있어야 합니다. 여자들의 고생이 크기 때문이죠. 저는 평소에 아내를 설득해 둔 덕분에 문제가 쉽게 풀렸습니다.”
“집(대지 20평, 건평 25평)이 좀 좁은 것 같다”는 기자의 논평에 “은퇴생활이란 가지고 있는 것을 줄여나가는 것”이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의 하루 생활은 시간표대로 돌아간다. 포스코 시절 몸에 밴 습관 탓이다. 오전엔 밭에서 4시간 가량 일하고, 오후엔 3시간 정도 붓글씨를 쓴다. 저녁엔 서재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고, 컴퓨터로 세상을 나들이 한다. 잡생각을 많이 만드는 TV 연속극은 보지 않는다.
부부가 쓰는 한달 생활비는 약 120만원. “제주는 경제 규모가 작기 때문에 경조사비는 2만~3만원, 친구들과의 회식도 1만~2만원이면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생활비는 대부분 국민연금으로 조달한다. 32년간 직장생활을 한 김씨에게 83만원, 아내에게 30만원씩, 매월 113만원이 나온다. 아내는 직업을 가진 적이 없지만, 노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서울에 살 때 6년간 부금을 납입한 것이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김씨는 최근 일부 은퇴자들이 ‘월 200만원으로 상류층 노후생활이 가능하다’는 동남아로 떠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늙으면 고향으로 가서 살자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동남아가 물가는 싸겠지만 말 안 통하고 음식 문화가 달라 오래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병원 가깝고, 친구들 많고, 자녀가 찾아오기 쉬운 시골 고향이 백 번 더 낫습니다. 생활비도 월 100만~200만원이면 충분해 동남아보다 더 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