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종연횡이 이어지던 역대 대선은 2012년 대선에서야 일대일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박근혜는 보수, 문재인은 진보를 각각 통합해 치열하게 맞붙었습니다. 승자는 박근혜였습니다.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개혁적·합리적 보수까지 끌어안으며 과거사를 둘러싼 약점을 상쇄시켰습니다. 문재인 역시 심상정, 이정희, 안철수 등과 단일화를 이뤄냈지만 뭔가 부족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보수의 총합이 진보의 총합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준 결과입니다. 야권이 차기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뤄내기 위해선 단일대오 구축이 절대적입니다. 충분조건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래도 될까 말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만들어지면서 야권은 ‘착시효과’에 냉정을 잃고 있습니다. 대선 전망 역시 엄청난 어리석음과 오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3자구도 필승론입니다. 누구도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문재인, 안철수의 동시 출마에도 정권교체는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야권후보 단일화는 강력한 시너지 효과보다는 탈락후보 지지층의 광범위한 기권과 더불어 역설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여권후보 지지층의 결집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억지 단일화는불필요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野, 뻑하면 분당·합당 이합집산 vs 與, 결정적 위기에도 당 고수
야권은 정치적 고비 때마다 뻑 하면 분열을 선택했습니다. 김대중이 대선에서 승리할 때 당명은 새정치국민회의였습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지금 야당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동안 무수한 이합집산이 반복됐다는 것입니다. 굵직한 것만 봐도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2007년 대선 당시 열린우리당 탈당 사태와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새정치민주연합 창당과 분당 그리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탄생 등등. 그만큼 분열은 복잡했고 횟수도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97년 이후 야당의 당명 변화를 100%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의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민주당도 87년 대선 당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부터 시작해서 꼬마민주당, 새천년민주당, 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 그냥 민주당, 더민주당 등 한둘이 아닙니다. 더구나 분열 이후에는 반드시 통합이나 단일화를 추진하면서 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럴 거면 왜 분열했느냐”는 주권자들의 합리적 의심에는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습니다. 이념과 노선의 차이가 아니라 대권·당권을 둘러싼 권력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설령 2017년 대선에서 야권이 단일화에 성공한다 해도 과거 노무현·정몽준의 러브샷 단일화에 버금가는 감동이 되살아날 지도 의문입니다.
반면 여권은 분열의 고비는 있을지언정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2012년 대선과정에서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바뀌고 상징색이 푸른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뀐 게 거의 유일한 변화일 정도입니다. 물론 분열의 결정적인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2년 대선 당시 제왕적 총재론에 반발해 박근혜가 탈당을 감행해 잠시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곧 복귀했습니다. 2003년 차떼기 오명과 2004년 탄핵역풍 속에서 천막당사까지 만들며 악착같이 당을 지킨 것도 현 여권의 저력입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은 분당의 최대 고비였습니다. 이명박이 승리를 거뒀지만 박근혜는 경선승복을 선언했습니다. 갈 데 까지 간 네거티브 막장 경쟁 탓에 경선불공정을 명분으로 탈당 후 독자출마가 관측되기도 했지만 당 잔류를 선택했습니다. 이명박에 반발한 이회창이 출마를 선언, 러브콜을 보냈지만 박근혜는 거절했습니다. 18대 총선 당시 친박학살로 친박연대·친박무소속 연대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박근혜는 탈당 없이 당을 지켰습니다. 2010년 이른바 세종시 정국에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각각 수정안과 원안을 내세우며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갈등을 봉합했습니다. 최근에도 분열의 조짐은 없지 않습니다. 20대 총선 공천파동을 거치며 불거진 친박·비박 계파갈등과 친박의 압승으로 마무리된 8.9 전대 이후 비박계의 이탈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중론입니다. 정세균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에 반발해 엄청난 단일대오를 보여준 친박·비박의 모습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20대 총선 ‘여소야대’ 野 착시효과와 차기 대선 낙관론
‘통합 승리’ ‘분열 패배’라는 여의도의 공식은 20대 총선에서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지난 4월 13일 밤에는 모두가 놀란 충격적인 성적표가 나왔습니다. 분열된 야당이 승리했습니다. 결과는 여소야대였습니다. 새누리당이 180석 이상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야권 지지층의 두려움은 환호로 바뀌었습니다.
의석수를 살펴보면 더욱 명확합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새누리당의 과반은 붕괴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123석(지역구 110+비례 13), 새누리당 122석(지역 구 105+비례 17), 국민의당 38석(지역구 25+비례 13), 정의당 6석(지역구 2+비례 4), 무소속 11석입니다. 물론 총선 이후 탈당파 무소속 의원 7명이 복당하면서 새누리당이 129석으로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섰지만 여소야대는 변함이 없습니다. 비례대표 정당 투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누리당 33.50%, 더민주 25.54%, 국민의당 26.74%, 정의당 7.23% 등입니다. 야당 지지율의 합은 60%에 육박합니다. 거의 새누리당의 2배입니다.
총선결과에 따라 야권에서는 정권교체의 기대감이 뭉게뭉게 솟아올랐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4월 13일 선거 직전까지 새누리당의 과반획득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승리는 극적이었습니다.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20대 국회 전체 의석수에서 여야 비율이나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을 합산하면 야당의 대선 승리 가능성은 높아 보입니다. 게다가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에 대한 누적된 피로감,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보다 크게 나아진 것 없어 보이는 경제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야권의 기대는 어느 정도 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더민주의 제1당과 국민의당 약진이라는 총선 결과는 야권통합이나 후보 단일화 가능성을 떨어뜨렸습니다.
아울러 총선 평가에서 간과된 것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총선은 회고적 성격의 심판투표입니다. 미래 대한민국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에 대한 유권자의 동의와 지지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집권세력을 심판하는 성격이 더 큽니다. 따지고 보면 야권의 승리는 위기극복을 위한 정확한 비전제시에 따른 유권자들의 능동적 지지라기보다는 ‘이대로는 못살겠다’는 정권심판적 투표에 따른 어부지리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대선은 총선과 다르다’ 다자구도 시 野 대선승리 가능할까?
총선결과에 도취된 야권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습니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아직 본격적인 통합논의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선 직전 야권통합이 논의 테이블에 올랐지만 감정의 생채기만 남긴 후유증 탓입니다. 그러나 헤어진 기간이 길면 길수록 통합이나 단일화를 위해 나중에 치러야 할 비용이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차기 대선이 다자구도로 짜일 때 야권의 승리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새누리당의 3자구도 필승론은 대선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대선과 총선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실제 현 야권은 과거 양자구도 대선에서도 아주 어렵게 승리를 거두거나 아쉽게 석패했습니다. 2002년 노무현 당선(노무현 48.91% vs 이회창 46.58%)과 2012년 문재인 패배(박근혜 51.55% vs 문재인 48.02%)가 뒷받침합니다. 다자구도에서 야권은 늘 실패했습니다. 87년 대선 노태우 승리 vs 양김분열과 실패, 92년 대선 김영삼 승리 vs 김대중·정주영 패배, 2007년 대선 이명박 승리 vs 정동영·문국현 참패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야권 일각의 다자구도 필승론은 ‘오만의 극치’입니다. 야권이 분열되고 여권이 단일후보를 내세웠을 경우 승리한 전례가 없습니다. 마치 87년 대선 당시 실패를 경험했던 김대중의 4자구도 필승론을 보는 듯합니다. 4자구도 필승론은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각각 대구·경북(TK), 부산·경남(PK), 호남, 충청을 지역기반으로 두고 있는 만큼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선전하면 양김분열에도 DJ의 대선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DJ는 서울(노태우 29.95% 김영삼 29.14% 김대중 32.62%)에서 승리를 거뒀을 뿐 인천(노태우 39.35% 김영삼 29.99% 김대중 21.30%)과 경기(노태우 41.44% 김영삼 27.54% 김대중 22.30%)에서는 대패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계승 외치면서 180도 다른 모습의 더민주·국민의당
다시 말해 차기 대선에서 야권후보의 다자구도 필승론은 한마디로 허구입니다. 만에 하나 다자구도 속에서 야권 후보가 기적적으로 대선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정권 출범과 더불어 레임덕은 기정사실입니다. 현 정치지형을 고려할 때 다자구도 속에서 승리한 대통령은 득표율 40% 미만의 소수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87년 대선 당시 36.6%라는 역대 대선 사상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가 취임 이후 물태우로 불리며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김대중 역시 집권 후반 DJP 연대 파기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야권이 만약 대선 이후까지를 생각한다면 더욱 전략적인 사고로 움직여야 합니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김대중·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강조합니다. 양당 모두 김대중·노무현을 정치적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면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나 노무현이 잠들어있는 김해 봉하마을을 반드시 찾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통합을 강조했습니다. 권력의 절반을 통째로 내줬습니다. 생전에 87년 대선의 양김분열을 참 가슴 아파했다고 합니다. 노무현도 통큰 양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대선후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정몽준과의 단일화 협상에 과감하게 임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당장은 손해를 봤지만 멀리 봤을 때는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사실상 마이웨이를 고수하는 더민주와 국민의당에 과연 김대중·노무현 정신이 남아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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