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리더-23]민간 최초 女기장 "프라이 대신 닭이 되세요"

"조종 무섭냐고 물어보면 우스웠다..지금은 조심스러워"
조언 구하는 후배 보면 "열정이 자극으로 돌아와"
여성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하라" 조언
  • 등록 2012-09-18 오전 8:44:55

    수정 2012-10-09 오전 9:18:23

[이데일리 서영지 기자] 남성적이고 호탕한 말투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는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주변 소음에 목소리가 묻힐까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할 정도였다. 여성 기장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지난달 14일 인천국제공항 대한항공 수화물실에서 신수진 기장을 만났다. 한국 최초의 민간 여성 기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그였다.

신 기장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교관생활로 항공기 조종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조종사가 될 길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관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때가 됐다고 여겨 한국에 와서 대한항공에 지원했다. 운이 좋았을까. 대한항공 사상 처음으로 뽑힌 여성 조종사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장인 신수진 씨가 모형비행기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사진=한대욱 기자


◇‘최초’ 수식어 부담? “기회에 감사해요”

‘최초’라는 이름표가 부담스럽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신 기장은 “처음이라는 부담감보다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꿈을 꾼다고 모든 것이 현실로 이뤄지는 것이 아닌데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꿈에서 그치지 않은 것이 감사하다며 겸손해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변화가 많이 생겼다고 했다. 예전보다 평정심도 길렀고, 누굴 미워하기보다는 아울러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다.

대형기 기장이 되려면 대형기 부기장 과정을 거쳐 소형기를 운항해야 한다. 대형기를 타다 소형기로 다시 보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기장은 소형기와 대형기에서 번갈아 가며 배운 기술을 모두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형기에서 다시 소형기로, 마지막에 대형기 기장이 되는 것은 기술을 한 조각 한 조각 집약해 퍼즐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대형기 기장이 되기 위한 마지막 훈련을 받을 때에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기장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부기장 시절을 보내며 신 기장이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한 덕분이었다.

신 기장은 “지금도 정비사나 외국 항공사 기장들이 ‘네가 진짜 캡틴이냐?’고 물어보는데 그렇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며 아직도 여성 기장에 대한 편견이 있음을 아쉬워했다.

◇기장은 모든 걸 안고 가는 자리..“무섭다기보단 조심스럽죠”

사진=한대욱 기자
대형 항공기를 몰다 보면 가끔 겁나는 때도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부기장이 처음 됐을 때 사람들이 많이 물어봤는데 겁날 게 뭐가 있을까 싶어 웃겼다”고 말했다. “지금은 무섭다기보다는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때와 지금은 짊어진 게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부기장 때에는 기장을 믿고 가면 되지만, 기장은 모든 것을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태평양을 6~7시간씩 건널 때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렇게 해야지’ 하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여성이라서 기장이 되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을까 궁금했다. 그는 “대한항공이 보수적인 것처럼 보여도 능력에 대해서는 차별이 없다”며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성에 대한 대우가 좋다”고 말했다.

현재 대한항공에는 여성 기장 3명, 여성 부기장 2명, 여성 훈련조종사 4명이 있다. 신 기장은 이들에게 하늘 같은 선배다. 비행을 시작하는 후배들이 안전운행의 비법이 뭐냐고 묻을 때마다 그는 “끝까지 열심히 하라”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열정을 품고 조종간을 잡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자극을 받는다고 한다. 지금은 일상이 됐지만 예전에는 조종석에 앉아 보는 게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하는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자라고 선 긋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은 끝까지”

사진=한대욱 기자
여성의 리더십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그는 “우리는 존경을 강요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며 “앞으로는 부드러운 힘이 후배들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낮추고 섬기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사회에 진출하는 모든 여성 후배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선을 긋지 말고 자신의 한계를 과소평가하지도 말았으면 해요. ‘나는 여자니까, 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하며 스스로 선을 긋고 도전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20대 중반에서 끝났을 겁니다. 학벌이나 경제적 문제 때문에 능력이나 한계를 긋지 않았으면 해요. 용이 아니더라도 닭이 될 수 있습니다. 닭과 계란 프라이드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세요? 내가 알을 깨고 나오면 닭이 되는 거고 남이 깨주면 프라이가 되는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하세요. 현재를 열심히 살면 그게 곧 내 미래가 될 겁니다.”

■신 기장은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해 미국에서 조종 교육을 받고 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996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1997년 한국 첫 여성 부기장으로 임명된 뒤 2008년 첫 여성 기장이 됐다. 현재 B777 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총 비행시간은 5600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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