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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노무자로 일하며 사업가의 꿈을 키우던 이 회장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사카 동남쪽에 있는 쓰루하시 무허가 시장에서 자전거 타이어 장사를 하면서 사업에 발을 들여놨다.
특유의 리더십으로 쓰루하시 국제상점가연맹 회장을 맡았던 이 전 회장은 당시 재일교포에 대한 금융차별이 안타까워 뜻이 맞는 상공인들과 함께 1955년 오사카흥은(大阪興銀)이라는 신용조합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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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한국에 투자하는 재일동포 기업인의 자금지원을 위해 한국에 교민은행을 설립하는 방안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부에 교민은행 설립 허가를 신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1981년 7월20일 교민은행 설립을 위한 발기인 대회를 열고 9월14일 창립총회에서 이 전 회장은 대표이사로 추대됐다. 9월15일 신한금융개발을 설립했고 1982년 7월7일 신한은행을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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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명예회장은 신한은행 경영뿐 아니라 국가적인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88서울올림픽이었다.
1981년 9월30일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자 이듬해 ‘88서울올림픽 재일 한국인 후원회’를 결성하고 이 전 회장이 후원회장을 맡았다. 이 후원회는 일본 전역에서 동포 3000여명을 추진위원으로 위촉하고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10만여명의 후원금을 내 공식적으로 모인 성금만 525억원에 달했다. 이 돈은 올림픽 체조경기장과 수영 및 테니스 경기장, 올림픽회관,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 건립 등에 사용됐다. 재일동포 부인들은 1981년부터 올림픽이 열린 1988년까지 ‘1일 10엔 저금운동’을 벌여 16억원을 조성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 힘겨웠던 시기에도 이 전 회장은 한국 경제를 위해 발로 뛰었다. 과도한 외채와 외화부족으로 벌어진 IMF 사태였던 만큼 일본 엔화 송금 캠페인을 벌여 1개월 만에 139억엔을 본국으로 송금했다. IMF 구제금융 초기 1년여 동안 공식적으로 재일동포가 본국으로 송금한 엔화는 781억엔에 달한다.
이 전 회장과 관련한 여러 일화도 회자된다. 이희건한일교류재단 이사회 일원이었던 둘째 아들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신한금융그룹이 공용차량으로 공항에 마중 나간 것을 두고도 대노한 바 있다. 사적인 일에 공용차를 사용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만큼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같은 이 회장의 뜻을 받들어 2011년 3월 작고했을 때 유가족은 신한금융그룹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공교롭게도 발인일과 한동우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취임식이 겹쳐 신한금융 임직원들은 한 회장의 입을 통해 이 전 명예회장의 작고 사실을 들었을 정도다. 이 전 회장 가문 분위기 자체가 소탈하고 소박했다.
이 회장은 보유하고 있는 신한금융 주식을 모두 기부해 한일교류재단을 만들었다. 이 재단은 한일 학술교류와 일본내 조선인 학교를 지원하는 등 양국 교류를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신한금융그룹 관계자는 “이 전 회장은 본국투자협회를 주도해 한국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애국자”라며 “그룹 내에서 이 전 회장에 대한 존경심이 높은 것도 국가경제에 대한 기여와 이 전 회장의 성정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