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면, 이렇게 가는 건 어떨까요?"

창작뮤지컬 ‘어차피 혼자’ 낭독 공연 모습. 배우 조정은과 한우열 등이 연기했다. 뮤지컬은 현대사회의 고독사를 그렸다. 구청에서 무연고 사망자를 담당하는 두 직원을 통해 고독사의 심각성과 인간애를 담은 작품이다(사진=CJ문화재단).

전 세계에서 단일작품으로 가장 많은 돈을 번 콘텐츠는 뭘까. 영화 ‘아바타’? 틀렸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다. 1986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오페라의 유령’이 전 세계를 돌며 거둬들인 수익은 56억달러(6조 32억원). ‘아바타’의 매출액 27억달러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뮤지컬이 제3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라며 내놓은 분석이다. 한국에서도 뮤지컬산업은 주목받고 있다. 최근 5년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유지하며 몸집을 키웠다. 뮤지컬을 보기 위해 지난해 공연장을 찾은 관객은 700만여명. 뮤지컬 시장이 커지자 영화사 등 외부 자본까지 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뮤지컬이 내수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게 현실. 그렇다면 창작뮤지컬의 실상은 어떨까. 그 현장의 목소리와 모습을 담아 ‘문화GO! 창작이 답이다’라는 기획을 준비했다. 3회에 걸쳐 국내 뮤지컬 창작 현실을 주제별로 소개하고 진단한다. 시작은 ‘관객’이다. <편집자주>

[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지난해 12월 서울 신정동 CJ아지트. 공연이 끝났는데도 관객들은 극장을 떠나지 않았다. 저마다 머리를 숙이고 종이에 뭔가를 적기에 바빴다. “오늘 본 공연에 대한 만족도는 어떠신가요?” 들여다보니 종이는 이야기 및 음악 등 공연의 완성도를 묻는 설문지였다. 그런데 단순히 만족도만 체크하는 게 아니었다. “초반 몰입도가 떨어진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극중 인물 서산과 아버지와의 관계나 분노 등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을 높였으면 좋겠다” 등등. 작품에서 보완했으면 하는 점에 대해 관객들은 거리낌 없이 의견을 적어냈다.

창작뮤지컬 ‘어차피 혼자’(작 추민주·곡 민찬홍)가 처음 소개된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무대는 ‘낭독공연’이었다. 정식 공연에 앞서 세트 없이 배우들이 극본을 읽으며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공연을 일컫는 말이다. 미완성된 작품을 미리 보여주고 평을 듣는 사전 품평회인 셈이다.

낭독공연에서 관객들은 ‘빨간펜 선생님’이 된다. 냉철한 평가는 기본. 더 나아가 창작에 자극을 주는 산파가 되기도 한다. 제작사는 낭독공연 후 관객들이 내놓은 의견을 참고해 작품을 보완하거나 수정한다. 낭독공연은 관객과의 거리를 좁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2012년과 2013년에 걸쳐 가장 주목받은 창작뮤지컬 중 하나인 ‘여신님이 보고계셔’도 낭독공연을 거쳐 관객의 정서를 확인한 후 결말의 방향을 정한 사례다. ‘여신님이 보고계셔’를 비롯해 ‘풍월주’ 등의 작품 개발에 참여한 조용신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 예술감독은 “창작할 때 불분명할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 관객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이야기 방향 등을 조절할 수있다는 게 낭독공연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낭독공연이 제작진과 관객의 소통 창구 기능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현장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다.

창작뮤지컬 ‘어차피 혼자’ 낭독공연 모습. 공연에 10분 늦게 도착하자 1층 객석은 이미 꽉 차 있었다. 2층 난간에 앉아 공연을 관람했다.

미완성이지만 낭독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도 뜨겁다. ‘어차피 혼자’를 포함해 지난해 ‘균’ ‘정글라이프’ 등 다섯 작품의 낭독공연을 봤다는 차미리(25) 씨는 “창작뮤지컬을 보는 묘미 중 하나가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라며 “낭독공연에서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내는 일은 엄마 혹은 이모의 처지에서 아이를 키우는 느낌이 들어 설렌다”고 말했다. 지난해 낭독공연을 두 번 봤다는 김현주(21) 씨는 “내 의견이 공연 제작에 보탬이 될 수 있고 또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게 즐겁다”라고 했다.

제작사 등 공연관계자들끼리 모였던 낭독공연은 3~4년 전부터 일반 관객들에게 본격적으로 개방되면서 공연계의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는 모양새다. 화요일 오후 3시. 평일 오후임에도 ‘어차피 혼자’ 낭독 공연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티켓경쟁도 치열하다. 김선민 CJ문화재단 대리는 “티켓 예매가 시작된 지 1분 만에 136석 전석 티켓이 동났다”고 말했다. 두 달 앞서 같은 곳에서 진행된 ‘반짝! 내 맘’ 낭독공연도 준비된 객석이 꽉 찼다.

사실 뮤지컬은 화려한 볼거리와 음악이 작품을 완성하는 장르다. 그런데 이런 요소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연습무대’를 관객들이 찾아다니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공짜라서가 아니다. 문소연(22) 씨는 “새로운 걸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점에 끌린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