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이준신 순조회(‘순직한 조종사 부인들의 모임’) 회장
여러분 ‘순조회’ 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순직한 조종사 부인들의 모임’인데요. 여기에 조종사였던 남편과 그 뒤를 이어서 조종사가 된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두 사람을 모두 잃은 분이 계십니다. 오늘 현충일 이 분의 사연을 들으면서 우리시대 순국의 의미를 되짚어보겠습니다. 순조회 이준신 회장 연결되어있습니다.
◇ 김현정> 현충원은 다녀오셨어요?
◆ 이준신> 조금 있다 가야죠. 어제 그제는 다녀왔고, 오늘은 또 좀 있다 가야 해요.
◇ 김현정> 하루 다녀오시는 게 아니라 며칠 이어서 갔다 오시는 거예요?
◆ 이준신> 딱 어느 날이다, 정해놓고 가는 게 아니고 그냥 수시로 가요. 어제 그제는 순조회 회원들 모임을 현충원에서 했어요.
◇ 김현정> 365일이 현충일이시군요, 우리 어머님한테는?
◆ 이준신> 저는 그렇게 됩니다.
◇ 김현정> 그렇게 부자의 묘가 나란히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먹먹하실 것 같아요?
◆ 이준신> 그렇죠.
◇ 김현정> 말로 표현이 힘들죠?
◆ 이준신> 네...
◇ 김현정> 남편이 순직하신 게 언제입니까?
◆ 이준신> 1984년도요.
◇ 김현정> 작전 중이셨던가요?
◆ 이준신> 그렇죠. 훈련작전 중이었으니까. 그때는 팀스피리트 작전이었으니까.
◇ 김현정> 남편 돌아가셨을 때 아들 나이는 어떻게 됐던 거예요?
◆ 이준신> 우리나라 나이로 5살, 3살, 그랬는데. 우리 딸 같은 경우는 3살이라도 18개월 때였으니까 돌 지나고 바로.
◇ 김현정> 갓난쟁이들 데리고 얼마나 생활이 힘드셨어요, 당장 어떻게 사셨어요?
◆ 이준신> 당장 앞일이 캄캄했죠. 너무 어리고,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도 없고, 한 1년간은 어떻게 일도 못하겠고. 애들 데리고 정신없이 여기저기 헤매고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한 1년 되고 나니까 정말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정신없이. 어쨌든 애들을 키워야 되니까. 그랬는데 일단 그렇게 남편이 순직하고 나면 공군 측에서 일자리는 알선은 해 주더라고요. 알선을 해 주는데, 저 같은 경우는 그쪽에서 알선해 주는 일을 하다보면 출퇴근 시간 맞추다보면 애들을 제가 못 키우잖아요.
◇ 김현정> 공군과 관련된 어떤 일?
◆ 이준신> 그렇죠. 그때는 은행 같은 데도 해주고, 부대 안에서 군무원 같은 걸로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고. 어쨌든 남편이 순직하고 나서 생활할 수 있는 게, 연금만 갖고 생활이 안 되니까 일은 해야죠. 일은 해야 되니까 그렇게 해 주는데. 저는 제 손으로 애들을 직접 키우고 싶어가지고 제가 애들을 같이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다보니까 자영업 같은 것을 해야 되잖아요. 제가 그렇다고 딱히 가진 기술도 없고. 저는 그냥 직장생활 조금 하다가 결혼한 상태이니까. 제가 그때 절에 다녔어요. 남편 그렇게 사고 나고, 절에다가 49재 모셔놓고.
◇ 김현정> 그래서 미용 일을 시작하게 되셨다고요?
◆ 이준신> 그때 스님이 미용 일을 권하더라고요.
◇ 김현정> 그래서 아들을 어렵게 키우셨어요, 건장한 청년으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 따라서 다시 공군이 되겠다고 한 건가요?
◆ 이준신> 그렇죠. 원래는 우리 아들은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그랬었는데, 그래서 일반대학에 시험 봤다가 잘 안 돼 가지고 재수 하는 중간에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예요. 공사를 가겠다고.
◇ 김현정> 아버지 따라서 공군 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님은 안 말리셨어요?
◇ 김현정> 그렇게 해서 갔는데?
◆ 이준신> 조금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고 거기에 젖다보니까, 사실 공사 나왔다 하면 전투기 조종사가 최고로 돼야 된다, 라는 그런 게 있거든요.
◇ 김현정> 공군 들어갔는데 비행을 못하게 막는다면 그게 또 쉽지 않은 일이죠?
◆ 이준신> 그 세계를 모르면 몰라도 제가 남편하고 살면서 겪어봤기 때문에.
◇ 김현정> 그래서 아들은 몇 년에 잃게 되신 거예요?
◆ 이준신> 2007년도에 그랬죠.
◇ 김현정> 아들도 역시 훈련 중에?
◆ 이준신> 그렇죠.
◇ 김현정> 그날 휴가 나와서 생일 치르고 미역국 먹여서 들여보낸 게 마지막이라고요?
◆ 이준신> 네, 그렇게 됐어요. 생일이 7월 16일이거든요. 그때 징검다리 연휴라 일요일에 왔다가 월요일에 가고. 17일이 아마 화요일이었던 것 같아요, 제 기억에. 하루 쉬니까 또 올라왔어요. 올라와서 전날 자기 생일은 지나간 거죠, 그렇게 17일 날 왔다가 가고, 그러고 나서 22일 날 그렇게 된 거죠.
◇ 김현정> “어머니, 미역국 잘 먹었습니다.” 하고 마지막 나갔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실 것 같아요?
◆ 이준신> 그날은 왔다가 사실 여자친구, 결혼하려고 했었으니까. 여자친구 엄마가 불러서 생일선물도 사주고 맛있는 삼계탕도 끓여주겠다 하더라고요.
◇ 김현정>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황망하게 보내셨네요?
◆ 이준신> 그렇게 됐어요.
◇ 김현정> 그래도 남편과 아드님, 자랑스러우시죠?
◆ 이준신> 그렇죠. 자랑스럽지만 그렇게 안 됐으면 더 좋았을 걸.
◇ 김현정> 순조회 회원 분들, 우리 이준신 회장 같으신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시는 거예요?
◆ 이준신> 아마 인원수를 따지면 거의 60명 정도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 30명 정도 되거든요. 물론 오래되셔서 돌아가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그리고 아직은 애들이 어려서 돌보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젊은 엄마들이 또 많죠. 그 사람들은 모임에는 잘 못 나와요. 저도 사실 모임에 나온 지는 얼마 안 됐어요.
◇ 김현정> 생활하는 자체가 너무 힘드시니까, 이해가 됩니다.
◆ 이준신> 다 연세들이 좀 많으시고. 70, 60, 그런 분들이 많죠.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아직 직접 생활전선에서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못 나오고. 그래서 모임에 나오시는 분들은 거의 25-30명 정도 그렇게 나와요.
◇ 김현정> 슬픔도 슬픔이지만 당장 먹고 살 일이 참 걱정일 것 같아요?
◆ 이준신> 애들은 어리고
◆ 이준신> 거의 다 공군 측에서 알선해 주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 김현정> 군인들은 관사 같은 데 살게 되잖아요?
◆ 이준신> 처음엔 관사에 살다가 남편이 순직하고 나면 나와야 되죠.
◇ 김현정> 나와야 되나요?
◆ 이준신> 그럼요. 나와야죠.
◇ 김현정> 그러면 집은 어떻게 마련을 해 줍니까?
◆ 이준신> 집을 어떻게 마련해 주겠어요, 직접 해야죠. 그런 게 어려운 거죠.
◇ 김현정>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됐는데도 그런 대책은 없나 봐요?
◆ 이준신> 그게 없더라고요.
◇ 김현정> 연금은 좀 나옵니까?
◆ 이준신> 연금은 조금 나오는데, 그게 생활하기가 힘들 정도로 나오는 거죠.
◇ 김현정> 혹시 살짝 밝혀 주실 순 있나요? 이게 직위마다 다른 건가요, 어떻게 되는 건가요?
◆ 이준신> 직위마다 다 다르니까.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확실히 기억을 하고 있는 건지 맞는지 모르는데, 남편이 받던 기본급의 40%인가 된다고 그랬던 것 같아요.
◇ 김현정> 기본급 자체도 그렇게 넉넉하지 않으셨을 텐데?
◆ 이준신> 기본급 자체가 작죠. 이것저것 수당 합쳐서 그나마... 특히 조종사들은 비행수당이 있으니까 조금 괜찮다 싶은데, 그런 것은 안 들어가고 완전 기본급의 40%이니까 생활 꿈도 못 꾸죠. 그것 갖고는. ◇ 김현정> 보상금 같은 게 좀 나오나요? 이번에 천안함 사태 보면 보상금도 있고 했던 것 같은데?
◆ 이준신> 그런 게 조금 사실 그래요. 천안함 같은 경우는 단체잖아요. 우리 공군 같은 경우는 비행사고가 나면 1명 아니면 2명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수의 인원들은 뭔가 안 된다고 해서 단체로 보상을 요구하고 하니까 그게 조금 되는 것 같은데, 공군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할 힘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한두 명이 내 남편 사고 난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달라고 그럴 배짱들도 없고 사실 여자들이. 그러니까 그냥 처분만 바라는 건데 그것만 갖고도 너무 약하죠. 어쨌든 힘이 없는 것 같아요.
◇ 김현정> 당장 세 살짜리, 다섯 살짜리 아이들 손잡고 가서 어디 가서 시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어디 찾아다니면서 조사하고 소송 걸고 이럴 수도 없는 거고?
◆ 이준신> 그럴 배짱들이 없는 거예요.
◇ 김현정> 그럴 여유가 있겠습니까? 남편 잃고 나서. 국가에 이것만은 바란다, 좀 부탁드린다, 하실 말씀 많으실 것 같아요?
◆ 이준신> 전 제가 어떻게 겪었는지 모르게 세월이 그냥 빨리 가버리고, 또 먹고 사는 데, 애들 키우는 데 정신없어서 이렇게 바랄만한 그런 것들도 없었던 것 같아요.
◇ 김현정>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도 안 나세요?
◆ 이준신> 그냥 생각도 안 나요. 사는데 누군가 나한테 뭘 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것보다는 그냥 내 어린 애들을 어떻게 그냥 아빠 없이 키우면서 남들한테 재는 아빠 없이 크는 애다, 손가락질 받지 않게 하려고 그런 데만 정신을 쏟다보니까...
◇ 김현정>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습니까? 아이들이 크면서?
◆ 이준신> 제가 안 받게 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제 아들이나 딸이나 별로 안 받았던 것 같은데, 모르죠. 저 없는 데서 남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 김현정> 그렇게 금쪽 같이 키운 아들인데 아들마저 나라를 위해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 이준신> 그렇게 됐어요...
◇ 김현정> 항상 남편 아들 생각하면 가슴으로나마 되뇌이는 말 같은 게 있으실 것 같아요. 항상 대화 나누시죠? 가슴으로?
◆ 이준신> 옛날 어른들 말씀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좋은 세상에 너무 젊은 나이에 간 게 안타까워요. 특히 우리 아들 같은 경우는 한창 좋은 나이잖아요. 뭐든지 항상 재미있게 즐겁게 살았거든요. 한창 정말 사랑하는 여자친구 만나서 결혼하려고 꿈에 부풀어있었잖아요. 그런데 결혼을 못하고 그렇게 간 게 너무 안타까워요.
◇ 김현정> 우리 어머니의 살아온 역사를 들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우리나라의 보훈문제, 거창한 거 얘기 안 해도 그냥 가슴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오늘 현충일 아침에 어려운 인터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