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재정위기가 주는 교훈 [김유성의 금융CAST]

대선 후보들 '확장적 재정' 이구동성
정부 부채 늘리는 것에 신중해야
남유럽 재정 위기도 근본에는 빚부담
  • 등록 2021-12-25 오전 11:00:00

    수정 2021-12-25 오전 11:00:00

[이데일리 김유성 기자] 각 정당 후보들이 경제 관련 공약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중 하나가 50조원 공약입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내세운 손실보상 50조원 공약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받는 모습입니다. 두 후보 모두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코로나19 위기를 위해 ‘큰 정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쓰는 돈의 양을 늘리기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금을 늘리거나, 빚을 내거나. 증세는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올 수 있지만 국채 발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 입장에서 손쉬운 방법입니다.

각 후보들은 ‘돈을 쓰겠다’고만 할 뿐 늘어가는 빚 부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듯 합니다. 정부가 빚을 내고 쌓아 놓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한 때는 잘 나갔다

오늘 전할 얘기는 2000년대 남유럽 국가들 얘기입니다.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2010년 재정 위기를 겪은 국가들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유로화를 사용하는 나라 중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던 그리스입니다.

그리스가 처한 현실과 우리나라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스의 정부 부채는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면서 200%를 넘겼습니다. 보통의 국가라면 부도 걱정까지 해야할 정도입니다.

GDP 대비 그리스 정부 부채 비율
혹자는 그리스 국민들과 그리스 정부의 포퓰리즘을 탓하기도 합니다. 지나친 복지 지출로 그리스 정부의 빚부담이 늘었고 결국 경제 위기로까지 갔다는 얘기입니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요?

그리스는 2차대전 후 고도 성장을 하다가 1970년대부터 정체기에 들어갑니다. 영국을 비롯한 스웨덴 등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이때 불황을 겪었습니다. 그리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1980년대 그리스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공공 부문을 차관으로 채웠는데 1992년말 국공채 비율이 그리스 GDP의 100%를 넘을 정도가 됐습니다. 유로존 가입 전부터 외채 의존적인 경제였습니다.

이런 그리스가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합니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럽 내 경제 공동체에 일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유로존 가입은 그리스 경제에 호재가 됐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관광객들이 몰려옵니다. 2006년 그리스의 성장률은 4.4%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유로존 국가 중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이 때는 전 세계 경기가 전체적으로 좋았습니다. 인터넷 정보 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떠올랐고, 미국의 금리 또한 낮게 유지되면서 신흥국에 흘러간 자금도 많았습니다.

관광 비중이 높은 그리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등도 호경기를 맞습니다. 유로화 단일 통화 체계 덕도 톡톡히 봅니다.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관광 시설에 대한 투자가 늘어납니다. 부동산에 대한 투자는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자산 가격이 올라가니 그리스 경제의 성장도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합니다.

그리스 정부를 짓눌렀던 빚에 대한 공포도 사라집니다. 민간 은행들도 대출을 내줍니다. 이 돈은 부동산 시장에 흘러갑니다. 부동산 가격은 다시금 오릅니다.

다시 찾아온 빚의 공포

빚의 공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믿었던 관광산업이 침체에 빠지고 부동산 가격이 떨어집니다. 은행들의 대출은 상당 부분 부실화됩니다.

독일의 정치사회학자이자 프랑크푸르트학파 2세대 격인 ‘클라우스 오페’가 지은 ‘덫에 걸린 유럽 : 유럽연합, 이중의 덫에 빠지다’를 보면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가 직접적인 위기의 뇌관이 됩니다.

유동성 파티에 취해 있던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펼쳤던 잘못된 재정 정책은 사태를 더 키웁니다. 유럽연합 결성 후, 유로존이 만들어진 뒤 쌓인 내부 모순이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중 하나가 그리스 같은 남유럽 국가들이 저리의 자금을 쉽게 쓸 수 있게 된 점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리스 정부 자체만의 신용도라면 높은 금리를 부담하며 적게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유로존 국가라는 이유 하나로 저리의 자금을 쉽게 끌어다 쓸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과도한 채무를 쌓아 놓았다가 한 순간에 위기에 빠진 것이죠.

정부 뿐만 아니라 민간 은행들도 빚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급격한 경기 위축에 따른 채무자들의 상환 능력 저하로 대출은 부실화됩니다.

은행은 위기에 빠지고 시장 금리는 올라갑니다. 기업은 돈을 빌리기 힘들어지니 도산하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습니다.

이때 그리스가 독자적으로 통화 정책과 금리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지 모릅니다. 경기가 나빠지면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낮추고 통화 발행량을 늘립니다. 시장 금리를 낮춰 기업과 가계의 부도를 막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돼 있고 유럽중앙은행이 중앙은행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만을 위한 미세한 통화 정책은 쉽지 않았습니다.

유로화의 함정

또 하나. 환율의 메커니즘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가 경제 위기에 빠지면, 그 나라 통화 가치는 하락합니다. 그 돈을 달러로 바꿔 갖고 있을 사람이 줄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나라가 수출할 수 있는 기업이 있다면 상황은 바뀝니다. 이 기업이 만든 물건의 수출 가격이 떨어지게 됩니다. 해외에 보다 싼 달러값에 팔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입 가격은 높아집니다. 더 많은 달러를 내야 해외 물건을 사올 수 있으니까요.

이는 결과적으로 무역수지 흑자를 이끌어냅니다. 나라 안에 외화가 쌓이게 되고, 이 외화로 빚을 갚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1997년 외환위기를 한국이 조기 졸업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

유로화 단일 통화를 쓰는 그리스에게는 이런 환율 변동에 따른 수출 증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유로존 유로화 가치가 하락하긴 했지만 그리스 경제를 회생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적자가 커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동안 쌓여왔던 빚부담이 그리스 정부의 목을 조릅니다. 경기 부양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데, IMF 등 채권 기관은 긴축재정을 요구했습니다. ‘빚을 줄이기 위해 정부의 세출을 줄여라’였던 것입니다.

정부의 수입 상당 부분도 이자를 내고 빚을 갚는 데 쓰였습니다. 그리스 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질 수 밖에 없게됐습니다. 정부의 빚이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한국은 다를까

한국은 그리스와 다릅니다. 지금까지는요. 아직은 수출 제조기업들이 효자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원화라는 우리 자체 통화를 쓰고 있습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과 통화스왑도 체결하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그들의 달러를 쉽게 빌려와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정부 부채가 GDP의 224%인 일본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빠릅니다.

잠재성장률도 1%대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말하면 지금보다 돈을 더 많이 벌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빚 부담 증가는 우리 다음 세대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그리스 정부의 빚이 2020년이 넘어서까지 그리스 시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처럼요.

증세 문제에 있어서는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보수 정당마저 세출 확대에는 찬성하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을 비판하던 정당마저도 대선 앞에서는 자신들의 생각이 바뀌나 봅니다.

위기는 앞으로도 계속 옵니다. 코로나19 위기를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어떤 위기가 올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 또 올 위기를 대비해 재정 여력 등을 갖춰 놓는 게 분명 필요해 보입니다. 이에 대한 대선 후보들의 계획과 공약이 있어야 하겠죠. 그런데 이들의 큰 그림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돈 쓰는 건 쉽습니다. 빚 내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빚부담은 10년 뒤 우리나 우리의 자식 세대가 감당해야 합니다.

대선 후보라면 심도 있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본인의 집권 기간은 5년이겠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을 한국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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