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판문점 선언’을 기대한다

  • 등록 2018-04-27 오전 6:00:00

    수정 2018-04-27 오전 6:00:00

남북한 분단 역사에 새로운 분기점이 열린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눈길을 끌 만하다. 민족의 비극이던 6·25전쟁이 마무리될 당시 휴전협상이 진행된 현장이다. 바로 이곳에서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남쪽 관할 지역으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은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영접을 받아 회담장인 평화의집까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누가 과연 상상이나 했겠는가.

두 정상이 마주앉아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과 관련한 방안을 논의하게 된다는 사실도 의미가 크다. 155마일에 이르는 철책선으로 국토의 허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항구적인 긴장완화를 이루기 위한 조치다. 철책선을 따라 감시 초소가 세워져 있고, 그 구간을 벗어나면 곧바로 지뢰밭이라는 사실이 지금의 군사적 긴장 상황을 보여준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때의 남북회담에서도 비슷한 논의들이 이뤄졌겠으나 한층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비핵화 논의는 더욱 중요하다. 강대국들이 지배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반도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 요건이기 때문이다. 북측에서도 이미 핵·미사일 시험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만큼 협상 결과에 기대감이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북한의 거듭된 도발로 일촉즉발 국면으로 치닫다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어렵사리 타협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부터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협상 결과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지금껏 여러 차례나 북측과 약속을 주고받았는데도 그대로 실현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핵 문제가 지금처럼 악화된 것도 북한이 과거 몇 차례에 걸친 포기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있다.

김 위원장 본인의 돌발적인 강성 본능이 변했다고 판단하기도 어렵다. 고모부 장성택과 그 주변 인물들이 연달아 처형됐고,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독살된 배경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 위원장 부부가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직접 관람하고 박수를 쳤다지만 일반 주민들은 남한 가요를 몰래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하는 이중성의 잣대가 존재하는 곳이 또한 북한이다. 우리가 내미는 악수에 응했다고 해서 그들의 진정성을 쉽게 믿어서는 낭패에 직면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판문점에서 발생한 사건들도 역사를 증언한다. 평화의집 서쪽 언덕 밑으로 돌아오지않는다리 앞에 밑둥으로만 남아 있는 미루나무는 도끼만행사건의 흔적이다. 현재 판문점 경비를 맡고 있는 JSA부대의 ‘캠프 보니파스’(Camp Bonifas)라는 명칭이 그때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붙여진 것임은 물론이다. 지난해 11월 북한군 오청성 하전사가 목숨을 걸고 귀순한 곳도 판문점이었다. 평화구간 설정으로 철책선이 걷히고 병사들이 철수하게 된다면 더 없이 바람직하겠지만 아직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경계심을 품을 필요는 없다. 북한이 남북대화를 수용해야 할 만큼 입지가 좁혀져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주변국들의 대화 요청을 뿌리칠 수 없는 처지다. 이번 기회를 잘만 살린다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북한 자신을 위해서도 유익하다는 생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오늘 회담에 임하면서 민족과 역사 앞에 겸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반도 분단 상황을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지닌 책임자로서 마땅한 자세다. 남북 간에 ‘평화, 새로운 시작’이 실현될 수 있을지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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