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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4면 모두 콱 막혀버렸다. 도무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호프집을 넘겨주고 나니 남은 것은 여기 저기 갚아야할 빚이었다. 빚 갚을 생각은 할 수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내 형편이 너무 어렵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랬는지 돈 갚으라고 독촉하지는 않았다. 너무나 고마웠다.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베이징 한족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 학비와 우리 네 식구 생활비는 현금으로 계속 들어가야 했다.
사면 초가가 아니라 하늘과 땅까지 6면이 모두 초가였다. 한국에서 긴급 송금되는 지원금으로 근근이 버틸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밤에만 숨 쉴 수 있는 창살 없는 ‘베이징 감옥’이었다. 낮엔 ‘방콕’ 생활, 밤이 되면 몇몇 한국인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는 ‘올빼미 나날’이 이어졌다. 그때 입에 익어 지금도 서울 대림역 조선동포촌에 가게 되면 종종 마시곤 하는 중국 술이 있다. 중국서 가장 저렴한 56도짜리 이과두주! 그 유명한 이과두주 얘기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홍성이과두주(紅星二鍋酒)! 베이징 지역에서 가장 서민적인 술로 우리가 ‘백알’이라고 하는 백주(白酒) 종류. 무색에 향이 없는 증류주로 기름기 많은 중국 음식과 궁합이 잘 맞아 서민들로부터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술값이 놀라울 정도로 저렴해 지갑이 가벼운 서민들에겐 딱이다. 우리 진로 소주 값의 4분의 1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저렴한 술인데도 너무 잘 팔려 얼마 전부턴 짝퉁이 생겼다고 하는 술이다. 소주를 즐겨 찾는 한국인 입맛에도 잘 어울리는 술이다. 특히 값이 너무 저렴한데다 한잔하고 나면 잠에 취해 버리는 술이다. 중국 공산 정부에 불평이 많은 ‘불순분자’들이 이 술이 없으면 잠을 청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그들이 잠을 잘 수 있었기에 공산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정부에 고분고분 할 수 없는 지식인, 반동분자들이 잠을 자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유일하게 반정부 음모 아닌가? 우리 세대도 1987년 서울의 봄 이전에 경험했던 사회상이다.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던 1997년 11월21일 밤 10시 드디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날은 일찍 잠이 들어 전혀 몰랐다. 다음날 베이징 한인 사회가 발칵 뒤짚히고 말았다. 이른바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였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인들끼리 모여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살길을 걱정했다. 한중수교 5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베이징에 뿌리를 내린 한국인은 거의 없던 시절이다. 한국에서 환치기 숫법으로 보내온 자금으로 버티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 돈 줄이 콱 막히게 된 것이다.
거의 모든 사업이 하루아침에 휘청거렸다. 현지화하지 못한 사업들이 하나둘인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였는데 뒤에서 달려온 택시에 제대로 받친 형국이다. 한국인을 주 고객으로 영업하던 식당은 말할 것도 없고 유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는 학교 앞 식당들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 한국에서 돈을 보낼 수 없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다음회 계속>
- 중국 전문가, 전직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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