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옥시 막자”…고개드는 징벌적 손배소·집단소송제

시민단체 등 강력 요구…“돈으로 처벌해야”
“효과적인 증거수집 방법 선행돼야” 지적도
“법적안정성 해치고 예측 불가능” 신중론도 많아
경제계 “악용사례 많고 기업활동 위축될 것” 우려
  • 등록 2016-05-16 오전 6:30:00

    수정 2016-05-16 오전 6:30:00

[이데일리 조용석 기자]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을 계기로 법조계 안팎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반사회적인 잘못을 저지른 기업에 대해 실효성이 있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소송이 남발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악용의 위험성도 커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환경운동 연합에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시민단체 등 “징벌적 손배제로 부도덕한 기업 처벌해야”


미국과 영국 등에서 시행 중인 징벌적 손해배상제(징벌적 손배제)는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잘못을 저지른 기업 등을 상대로 실제 손해액과 함께 징벌적 의미의 배상금을 함께 물리는 제도다. ‘불법행위자의 이득이 손해를 배상하고도 남는다면 안 된다’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지난 2월 미국 미주리주 배심원단이 존슨앤존슨(J&J)의 파우더를 수십 년 간 쓰다가 난소암으로 숨진 재키 폭스씨의 유족에게 840억원(7200만 달러)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 징벌적 손배제를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840억원 중 약 720억원이 징벌적 손해배상금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실제손해액에 위자료를 더하는 방식으로 손해배상금을 매긴다. 사망사건 위자료도 1억원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경우 옥시레킷벤키저(옥시)는 최소 수백명의 피해자를 냈지만 손해배상금을 내도 큰 타격은 없다. 시민단체 등이 징벌적 손배제 도입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병진 미국 뉴욕주 변호사는 “제품뿐 아니라 서비스나 용역 등도 모두 징벌적 손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며 “‘돈은 곧 힘’이라는 인식을 지닌 미국에서는 실제 손해액보다 더 많은 돈을 내게 하는 징벌적 손배제가 기업이 나쁜 의도를 갖지 않도록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징벌적 손배제와 함께 소비자 집단소송제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집단소송제란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처럼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을 경우 피해자 중 대표자만 소송을 하고 그 재판결과가 피해자 전부에게 적용되는 제도다. 미국 등이 이 제도를 시행 중이며 집단소송을 실시할 때는 징벌적 손해배상금도 같이 청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은 2002년부터 증권분야에서 제한적으로 집단소송제를 도입했다.

현재 국회에서는 제조업자가 제조물 결함을 알고도 상품을 공급해 피해를 입힌 경우 징벌적 손배제의 개념으로 손해액의 12배까지 배상토록 하는 제조물책임법 개정안(2013년 10월 백재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과 소비자집단소송법안(2014년 2월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이 계류 중이다. 해당 법안은 오는 19대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20일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모두 폐기된다.

제대로 하려면 ‘디스커버리’ 제도부터 도입해야

법조계에서는 징벌적 손배제 등을 제대로 시행하려면 피해자들이 기업 등을 상대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하는 ‘디스커버리(증거개시절차)’ 제도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영국 등에서 도입해 운영 중인 디스커버리는 정식 공판을 시작하기 전 상대방의 요청에 따라 사건과 관련된 이메일이나 서류 등의 내부자료를 열람하고 제출하는 제도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서류 제출 요청을 거부하거나 삭제했을 경우 제재를 받을 뿐 아니라 판결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준다.

반면 한국 민사소송은 원하는 문서를 정확히 특정해야 요청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제출하지 않는다고 해도 큰 제재가 없기 때문에 소송을 당한 기업이 관련 자료 제공을 꺼린다.

기업 등을 상대로 하는 소송에서 소비자들이 이기기 어려운 이유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옥시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패소한 것도 증거부족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승재 법무법인 다래 변호사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국가에서는 관련 자료를 정당한 이유 없이 제출하지 않으면 법원이 상대방의 주장대로 판단한다”며 “징벌적 손배제와 집단소송제가 도입된다고 해도 증거가 가장 중요한 민사소송에서 증거수집이 어렵다면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고 말했다.

신현우 옥시 전 대표가 13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단점도 고려해야” 법조계 신중론 대두


징벌적 손배제와 집단소송제 도입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필요성을 공감하지만 단점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았다.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민사재판에서 불법성과 배상액은 적절한 비례관계를 이뤄야하는데 징벌적 손배제는 판사의 재량에 따라 기업 등의 잘못에 비해 너무 과도한 책임을 지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징벌적 손해액 비율을 정확히 결정해 놓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그는 “징벌적 손해배상액은 실 손해배상액 3~4배 정도로 제한해야 배상액의 예측이 가능해지고 법적 안정성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계에서는 징벌적 손배제와 집단소송제 도입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악용 소지가 크고,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미국에서는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쪽에서 일부러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기업가치를 떨어뜨린 뒤 합병하는 등 악용사례가 너무 많다”며 “또 징벌적 손해배상의 판단기준도 애매해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이로 인해 소송이 남발되면 이에 대한 비용은 소비자도 함께 부담할 수밖에 없다”며 “현재 가습기 살균제 관련 사건 등으로 도입여론이 뜨겁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침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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